
“무취미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재미없는 인간. 굳이 말하자면 책을 읽고 음악을 듣는 정도. 음악은 재즈와 록, 클래식을 그때그때 기분에 따라 틀어놓는 경우가 많다.”
이마사키 유키히코(今崎幸彦) 일본 최고재판소 재판관은 지난해 10월 27일 ‘국민심사’를 앞두고 취미를 묻는 NHK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한국의 대법원과 헌법재판소 기능을 도맡는 최고재의 재판관은 15명이다. 임기는 따로 없고 정년은 70세다. 임명권자인 내각의 눈치를 보지 말고 재판만 하라는 장치다.

대신 이들은 헌법에 따라 임명 후 처음 실시되는 중의원 총선거 때 국민심사를 받도록 돼 있다. 또 10년이 경과하면 다시 심사를 받는다. 총 투표수에서 과반의 ‘X’ 표를 받으면 파면이다. 위헌 여부까지 다루는 판사의 막강한 권한에 대한 민주적 통제를 보장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1949년부터 총 26번의 국민심사에서 파면된 재판관은 단 한 명도 없다. 파면 찬성율 역시 대부분 한 자릿수다. 일본 국민의 관심 밖이어서다. 언론을 통해 약력, 주요 판결, 취미와 신조 등을 어필해보지만 함께 치르는 총선에 묻히기 일쑤다. 그러다 보니 “투표용지에 거액을 쓰는 유명무실한 제도”라며 폐지하자는 의견도 많다.
최고재 수장(장관)을 겸임하는 이마사키 재판관은 동료 5명과 함께 이번 심판대에 올랐다. 그런데 의외의 결과가 나왔다. 6명의 평균 파면 찬성률이 10%를 넘었다. 34년 만의 일이었다. 게다가 이마사키 재판관이 11.46%로 가장 높았다. 무색무취한 그를 꼭 집어 비토할 만한 뚜렷한 이유는 없었다. “최고재에 대한 문제의식이 장관인 그에게 향했을 수 있다”(니시카와 신이치 메이지대 교수)는 정도의 해석이 나왔다.
일본사회의 금기인 ‘부부동성제’가 발단이 됐을 수도 있다. 일본에선 95% 이상의 기혼 여성이 남편 성을 따른다. 최고재는 부부별성을 인정하지 않는 민법과 호적법 규정에 대한 두 차례 위헌 소송에서 모두 합헌 결정을 내렸다. 시대에 뒤처진 판결에 대한 반발 심리가 국민심사 결과로 이어졌을 것이란 얘기다.
세계적으로 보기 드문 이 제도를 한국에 이식한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탄핵 찬반으로 나뉜 광장의 열기만큼 투표율 역시 화끈할 터. 8명의 헌재 재판관 중 몇이나 신임을 받을까.
일본에선 국민심사 공보 게시물 끝에 ‘재판관으로서 마음가짐’을 묻는다. 이마사키 재판관은 “재판의 틀을 넘어 독선에 빠지지 않도록 한다”고 썼다. 헌재 재판관들은 뭐라고 쓸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