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주가치 제고를 명분으로 취득한 자사주를 소각하지 않고 최대주주에게 처분해 지배력을 확대하는 수단으로 악용하는 사례가 잇달아 발생하고 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예비후보가 자사주를 원칙적으로 소각하는 방안을 추진하겠다고 공언한 만큼 제도 시행 전에 자사주를 다른 목적으로 처분하려는 움직임도 빨라질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23일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따르면 KPX그룹 지주사인 유가증권시장 상장사 KPX홀딩스는 이달 15일 양준영 대표에게 9억 9088만 원 규모의 자사주를 처분했다고 밝혔다. 같은 날 계열사 KPX케미칼도 36억 7941만 원 규모의 자사주를 최대주주인 KPX홀딩스에 처분했다.
자사주 처분이 마무리되면서 양 대표의 KPX홀딩스 지분율은 11.77%에서 12.19%로 0.42%포인트 늘었다. KPX홀딩스의 KPX케미칼 지분율 또한 50.8%에서 52.55%로 1.75%포인트 확대됐다. KPX홀딩스 최대주주는 양 대표가 지분 100%를 보유 중인 비상장사 씨케이엔터프라이즈다. 이번 자사주 처분이 양 대표 개인의 지배력을 강화하는 데 활용된 셈이다.
KPX홀딩스는 지난달 사업보고서 제출 시점까지만 해도 자사주를 처분할 계획이 없다고 했으나 불과 한 달 만에 뒤집었다. 자사주 취득이 이뤄졌던 2021년 5~11월 KPX홀딩스 주가가 6만 5000~8만 원 사이에서 거래됐던 것을 감안하면 1주당 5만 6300원에 자사주를 처분한 것도 문제다. 무엇보다 이해 당사자인 양 대표가 이사회에 참석해 해당 안건에 찬성한 것은 법적 문제가 될 소지가 있다.

회사는 경영상 필요한 자금을 효율적으로 조달하고 자사주 처분이 주가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 최대주주 본인인 양 대표에게 처분했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회사가 보유한 자사주는 의결권이 없지만 이를 처분하면 의결권이 살아나기 때문에 처분 상대방 등을 선정할 때는 공정성을 고려해야 한다. 자산운용 업계의 한 관계자는 “자사주 처분은 가급적 시장에서 거래하거나 모든 주주에게 공평하게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바람직한데 특정인을 선정했다면 불가피한 이유를 충분히 설명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코스닥 상장사인 헥토이노베이션 역시 이달 4일 82억 6409만 원 규모의 자사주를 최대주주인 이경민 대표이사에게 고스란히 넘겼다. 자사주 처분 단가는 1만 1820원으로 취득 시점의 주가인 1만 3000~1만 8000원 대비 낮다. 이 대표 지분은 24.44%에서 38.74%로 14.30%포인트나 확대됐다. 마찬가지로 최대주주 지배력 강화를 위해 자사주가 활용된 것이다. 헥토이노베이션 관계자는 “최대주주의 지분율 증가로 책임경영이 강화됐고 매매 가능성이 없기 때문에 주가 희석 요인이 낮다”고 설명했다.
유가증권시장 상장사인 솔루엠 또한 최대주주인 전성호 대표에게 211억 원 규모의 자사주를 처분한다. 다음 달 이후 자사주 처분이 마무리되면 전 대표의 지분율은 14.60%에서 17.03%까지 확대된다. 처분 단가는 1주당 1만 7750원이다. 솔루엠은 유상증자를 기준으로 산정한 값에 3% 할증하는 등 합리적으로 처분 단가를 산정해 ‘사실상 소각에 가까운 행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자사주 취득이 이뤄진 2021~2024년 주가가 2만~3만 원 수준인 데다 이달 11일 주가가 장중 1만 3870원으로 최근 5년 이내 최저 수준까지 하락한 점을 감안하면 주가가 저점일 때 의사 결정을 했다는 주주 반발을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자사주를 소각하지 않고 보유만 하거나 다른 목적으로 처분하는 것도 문제지만 최대주주에게 처분하는 것은 심각한 주주가치 훼손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회사와 주주 자금으로 자사주를 매입한 뒤 특정인에게 처분하면 이익이 집중되기 때문이다. 이남우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 회장은 “미국에서 자사주 처분은 신주 발행과 같은 규제를 받고 당국 신고 등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야 하는데 한국은 이사회 의결만으로 쉽게 처분할 수 있다”며 “지배주주와 관련한 사안인 만큼 이사회가 아닌 사외이사 중심으로 별도 위원회를 구성해 의사 결정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