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굶주림이 주는 모욕과 부끄러움, 불의, 죽음에 이르는 육체적 고통도 끔찍하지만, 인류가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기록하지 않는다면 그 고통은 더욱 심화될 수밖에 없습니다. 보고서 숫자들 뒤에 감춰진 인간의 고통과 모욕의 규모를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지난달 25일 서울 중구 커뮤니티하우스 마실에서 열린 ‘2025 세계기아리포트’ 행사에 연사로 나선 미쉘 윈트럽 주한 아일랜드 대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계기아지수(Global Hunger Indec, GHI)가 발표된 지 올해로 20주년이 됐다고 합니다. 점선면팀은 올해 세계기아지수가 발표되는 이 행사에 다녀왔는데요. 지금과 같은 추세라면 2030년까지 ‘제로헝거’(Zerohunger·기아종식) 목표 달성은 어려울 것이라는 암울한 전망을 듣고는 마음이 무거워졌습니다. 오늘 점선면은 세계기아지수란 무엇인지, 세계는 물질적으로 점점 풍요로워지고 있는데도 기아가 사라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지 짚어볼게요.

세계기아지수란 전 세계 아이들의 굶주림 정도를 수치화한 지수입니다. 아일랜드에 본부를 둔 비정부 인도주의 전문기관 컨선월드와이드와 독일에 본부를 둔 비정부개발 및 인도주의단체 세계기아원조(Welthungerhilfe)가 공동으로 개발했는데요. 이들 단체들은 기아 문제를 정량적으로 점검하기 위해 2006년부터 매년 통계를 내고 있습니다. 세계기아지수는 기아가 가장 없는 최저 0점부터 기아가 가장 많은 최고 100점 사이의 점수로 측정되는데요. 심각도는 9.9점 이하 ‘낮음’, 10점 이상 19.9점 이하 ‘보통’, 20점 이상 34.9점 이하가 ‘심각’, 35점 이상 49.9점 이하가 ‘위험’, 50점 이상 ‘극히 위험’으로 나뉩니다.
기아는 먹을 게 부족하다는 이유만으로 생기는 문제가 아닙니다. 영양 불균형, 비위생적인 환경, 부족한 돌봄 등 다양한 요인이 기아와 얽혀 있는데요. 세계기아지수는 이런 복잡한 기아 문제를 분석하기 위해 ‘영양결핍’, ‘아동 발육부진’, ‘아동 저체중’, ‘아동 사망’ 등 네 가지 지표를 결합해 점수를 냅니다. 올해 세계기아지수에서 측정한 ‘세계에서 가장 배고픈 나라’ 5개국은 소말리아(42.6), 남수단(37.5), 콩고민주공화국(37.5), 마다가스카르(35.8), 아이티(35.7)로 전부 ‘위험’ 수준이었습니다. 정부 기능의 약화로 인해 발생한 내전 등 극심한 정치적 혼란을 겪고 있는 국가들입니다.
데이터를 확보하지 못해 세계기아지수 점수를 산출하지 못했지만 기아 문제가 심각할 것으로 추정되는 국가들도 적지 않습니다. 북한이 대표적인데요. 2018년 이후 데이터가 확보되지 않았고 현재 ‘심각’ 수준으로 분류되고 있습니다. 2025 세계기아리포트는 “오랜 정치적 고립이 기아 위기의 근본 원인으로 작용되고 있다”며 “약 1200만명이 만성적인 기아 상태에 놓여 있다”고 분석합니다. 이 밖에도 레소토·수단(심각 수준으로 추정), 부룬디·예멘(위험 수준으로 추정) 등의 국가에 대해서는 데이터조차 확보되지 않고 있어요.

유엔(UN)은 2030년까지 기아를 종식한다는 제로헝거 달성을 목표로 세웠습니다. 현재와 같은 추세가 계속된다면 달성은 어려워 보입니다. 세계기아지수는 2016년까지는 19점(‘보통’ 수준)을 달성하며 실질적인 진전을 거뒀는데요. 9년이 지난 올해에는 소폭 하락한 수준인 18.3점(‘보통’ 수준)에 그치면서 큰 폭의 개선은 이뤄내지 못했습니다. 현재와 같은 속도라면, 2137년은 돼야 전 세계적으로 ‘낮음’(9.9점 이하) 단계에 도달할 수 있을 것으로 예측됩니다.
제로헝거의 꿈이 멀어진 가장 큰 이유는 분쟁입니다. 지난해 발생한 무력 분쟁은 20건 이상의 식량 위기를 불러일으켰고 1억2200만명을 넘는 이주민을 발생시켰습니다. 도미닉 크라울리 컨선월드와이드 CEO는 2025 세계기아리포트 행사에서 “기아의 75%는 분쟁과 직접 연결돼 있다”며 분쟁과 기아의 악순환을 지적했습니다. 실제로 유엔 식량농업기구(FAO)가 개발한 식량 위기 평가 지표인 ‘통합식량안보단계분류(IPC)’를 살펴보면, 식량 위기 최고 단계인 ‘기근’에 직면한 인구는 지난해 2023년 대비 두 배 이상 증가한 약 200만명에 달합니다. 이 중 95%는 분쟁 중인 수단과 가자지구 두 지역에 집중돼 있습니다.
급격히 줄어든 인도주의적 지원도 기아 문제를 악화시킵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취임 직후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우며 대부분의 인도주의적 지원을 중단했습니다. 독일, 영국을 비롯한 유럽 국가들도 지원을 줄이는 추세입니다. 유엔 인도주의업무조정국(UNOCHA)이 발표한 ‘글로벌 인도주의 개요’에 따르면, 지난 7월까지 연간 필요한 자금의 16.8%만이 확보됐습니다. 이는 지난해 대비 약 40% 낮습니다.
결국 기아 종식을 위해서는 기아를 유발하는 가장 파괴적인 요인인 분쟁 자체를 줄이는 것이 ‘정답’일텐데요. 특히 전문가들은 분쟁 지역에서 기아를 유발해 전략적 이득을 취하려는 행태에 대해서 국제 사회가 강력하게 제재를 가해야 한다고 지적합니다. 일례로 이스라엘이 가자지구를 봉쇄하고 구호품 반입을 차단하며 가자지구를 ‘살아 있는 감옥’으로 만든 것에 대해서도 국제사회가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합니다. 지난 8월 경향신문 인터뷰에서 40년간 집단 기아를 연구해 온 알렉스 드 발 터프츠대 교수는 “집단 기아는 병원이나 학교 오폭과 달리 절대 실수로 일어날 수 없다”며 가자지구의 집단 기아는 고도로 정교하게 설계된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도미닉 크라울리 CEO는 ‘기아 문제는 잊힌 것이 아니라 우리가 무시하기로 결정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기아 문제는 잊힌 위기(forgotten crises)가 아니라 ‘방치된 위기(neglected crises)’다. 우리가 무시하기로 선택한 것”이라며 “우리가 대응하지 않기로 선택한 것이고, 국제사회가 필요한 대응에 자금을 지원하지 않기로 선택한 것”이라고 꼬집었는데요. 개인 차원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첫 번째 과제는 기아 문제를 정면으로 직시하는 것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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