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년 전 '이준 열사 숨진 호텔 방치' 칼럼…이 부부 운명 바꿨다 [독립의 얼 잇는 사람들]

2025-08-10

헤이그 이준 열사 기념관 송창주 관장 부부

9일(현지시간) 오전 네덜란드 서쪽 끝의 도시 헤이그. 좁은 골목길에 태극기가 휘날리고 있었다. 이준 열사 기념관의 운영 시간이라는 뜻이다. 소박한 출입문의 작은 초인종을 누르니 송창주(86) 관장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울렸다. “문을 힘차게 밀고 2층으로 올라오세요!” 문 뒤로 나타나는 계단이 좁고 가파르다.

옅은 갈색의 마루 바닥은 잘 닦이다 못해 반짝였다. 기념관 1~3층의 벽과 테이블마다 자료와 사진이 빼곡했다. 송 관장 부부가 30년 동안 찾고 모은 전시품 총 200여점이다. “더 찾고 정리할 게 아직도 많다”는 이들의 말투가 단단했다. 전시품들 사이 곳곳에는 정성껏 손질해 꽂은 생화 다발들이 놓여있었다.

송 관장과 이기항(89) 이준 아카데미 원장 부부는 1995년 8월 5일 이준 열사 기념관을 열었다. 꽉 채운 30년동안 직원을 둔 적도, 남의 손을 쓴 적도 없이 부부가 기념관을 채우고 쓸고 닦고 이끌었다. “상하면 안되는 곳이다. 바깥 유리창 닦는 것만 남에게 맡긴다.”

기차로 한 시간 거리의 암스테르담에 사는 부는 매일 오전 10시 30분 태극기를 걸며 기념관의 문을 열고, 오후 6시 태극기를 내린 후 도시를 건너간다. 통째로 문을 닫은 코로나 시절 3년을 제외하고는 한번도 거르지 않았다. 부부가 각각(1993년, 2023년) 국민훈장 목련장을 받기 위해 한국에 머물렀을 때는 잠시 다른 사람의 손에 맡겼다.

이준 열사는 48세이던 1907년 7월 14일 이 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헤이그의 만국평화회의에 이상설·이위종과 함께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고종의 특사로 왔다가 회의 참석에 실패한 후였다. 특사들은 그 대신 기자회견을 열고 성명서를 발표하며 40여년 이어진 독립운동의 포문을 열었다. 헤이그 특사가 머물렀던 ‘드 용(De Jong)’ 호텔이 기념관의 전신이고, 특사들의 객실이 각각의 기념실이 됐다.

송 관장 부부의 30년에는 어떤 사명감이 깃들어 있었을까. 기념관에서 만난 이들은 “신문 칼럼 하나에서 우연히 시작됐다”고 설명했다.

어떤 칼럼이었나.

“정확히 1992년 7월 14일이었다. 일간지인 NRC(Het NRC Handelsblad)에 실린 프리랜서의 칼럼인데, 한국인 젊은이가 분사(憤死)했던 호텔이 방치돼 있다라는 내용이었다. 저녁 자리에 가족 중 누군가가 그 신문을 들고 왔고, 우리가 이 집을 구입해야겠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안된다면 그 옆 건물이라도 사자는 마음에 그 이튿날 여기에 왔다.”

기념관 건립을 염두에 뒀나.

“아니다. 일단 구하자는 마음이었다. 건물은 1620년대 지어졌다. 너무 오래됐으니 곧 철거될 가능성이 컸다. 역사가 사라지면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건물 상태는 어땠나.

“1층에는 헤이그에서 제일 큰 당구장이 있었다. 새벽 1시까지 맥주 마시고 담배를 피웠다. 주인이 없었던 2·3층은 들어와 보니 쓰레기장 같았다.”

매입 과정도 궁금하다.

“건물은 헤이그시 소유였다. 시장에게 편지를 썼고, 이 건물의 역사적 가치를 알게 된 시장이 매입을 도왔다. 물론 그 사이에 규정 문제 같은 난관이 많았다.”

송 관장은 평안남도 평원, 이 원장은 평안북도 강계 태생으로 6ㆍ25 전쟁 이후 남한에 왔다. 송 관장은 이화여대 가정학과를 졸업해 이화여고에서 9년동안 교사로 일했다. 이 원장은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뒤 1972년 대한무역진흥공사에서 암스테르담으로 파견돼 인삼차를 유럽에 판매하는 일을 했다. 1975년에 사직하고 부부의 이름을 딴 사업체를 세웠다. 한창 사업에 매진하던 부부가 기사 한 줄로 헤이그 특사의 호텔을 매입했다는 전개가 평범하지는 않다. 매입 비용으로만 20만 달러가량이 들었다.

그 이전에도 헤이그 특사에 대한 관심이 있었나.

“1988년 서울 올림픽 때 아들과 딸(당시 20대)이 자원봉사를 했다. 우리도 함께 서울에 들렀는데 그때 이준 열사의 추도식을 보게 됐다. 네덜란드에 돌아와 91년 헤이그에서 추도식을 열며 자료를 모았다. 그러던 차에 기사를 본 거다.”

그렇다면 자료 수집의 역사가 기념관 개관 이전으로 거슬러간다. 어떤 과정으로 모았나.

“(이 원장이 송 관장을 가리키며) 이 양반이 10년을 헤이그시 문서보관소, 도서관, 고서점에서 살다시피했다. 지독한 사람이다. ‘코리아’라는 말이 들어가는 모든 문서와 신문 기사를 뒤져 이준 열사의 사망 증명서 같은 걸 찾았다. 전시하지 못한 것들도 많은데 언젠가 자료집으로 잘 정리하려 한다.”

한국 쪽에도 자료가 있었을텐데, 후손에게 받은 것도 있나.

“이준 열사의 유족 중 아들 쪽은 다 북한에 있고 외손녀가 서울에 살았다. 처음에는 전화로, 그 다음에는 찾아가서, 여름이면 수박 싸들고 가서 만났다. 결국 개관할 때 이준 열사의 친필 이력서와 청원서(을사늑약을 도운 재판장의 면직을 고종에게 청원한 문서)를 외손녀가 직접 들고 오셨다.”

무엇이 궁금해 자료 조사에 매진했나.

“중요한 질문들이 있었다. 그 중 하나가 ‘헤이그 특사는 왜 국제 회의장에 못 들어갔는가

?

’였다. 사람들은 보통 일본이 방해해서 회의장에 못 들어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일본의 직접 방해 때문만은 아니었다. 당시 45개국 239명이 회의를 했다. 각국의 외교 대사와 국방 장성 두 그룹이었다. 우리는 2년 전 을사늑약으로 이미 다 빼앗겼다. 회의 기간 로테르담에는 일본의 해군 군함 두 대가 떠 있었다. 힘 없이는 평화도 없다. 사람들이 그런 걸 느끼기를 바랐다.”

개관 이후 30년 동안 9만여 명이 이 기념관에 들렀다. 이 원장은 “코로나 이전에는 한 해 7000명까지 왔다. 한국 사람들이 네덜란드에 여행을 오면 암스테르담에 가지 여길 올까 싶었는데 이 집에 오기 위해 찾았다는 사람이 많았다”고 말했다.

송 관장이 생각하는 이준열사기념관의 모델은 암스테르담의 ‘안네 프랑크의 집’이다. "거기에는 독일인 관람객이 가장 많이 온다. 이준열사기념관에도 역사와 법을 공부하는 일본인이 많아 방문해 고무적이다. 이들이 더 늘어나야 하고 이준 열사를 소재로 한 콘텐트가 나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인터뷰를 진행한 3시간동안에만 관람객이 15명 정도 다녀갔다. 토요일인만큼 평소보다 많은 숫자라고 했다. 가족 단위가 많았고 거의 한국인이었다. 이들은 성인 11유로, 아이 7유로의 입장료를 내고 천천히 전시물을 둘러봤고, 명함 크기의 태극기에 이름을 써넣어 이준 열사 방의 침대에 올려놨다. 작은 태극기 수백개가 침대 위에 수북했다.

운영비가 상당했을텐데, 30년동안 비용을 어떻게 감당했나.

“맞다. 덩어리가 크다. 특히 부동산세와 보험료가 많다. 그동안 크게 몇번 지원을 받았다. 첫번째는 전경련이 4억원을 도와줬다. 한국 정부의 지원도 받았다. 중간 중간에 벽난로를 수리하는 일 등에도 지원을 받았고, 2006년부터 활성화 경비를 매년 몇 천만원 정도 지원받고 있다. 하지만 기념관의 문 밖에서 받은 후원은 1원도 없다. 이게 원칙이다. 개인들이 편지를 보내기도 하고, 후원하겠다는 분들도 많다. 하지만 우리는 다 정중히 거절한다.”

이유가 뭔가.

“받았다 하면 뭔가 돌려 줘야 된다. 우리는 줄 수 있는 게 없어서 받지 않는 것 밖에는 길이 없다. 덕분에 이 기념관에는 잡음이 없었다.”

30년동안 회의도 있었으리라 본다.

“운명으로 생각했다. 여기 네덜란드에 살게된 것, 그리고 건물을 사서 운영한 것 모두 처음부터 계획했던 것도 아니다. 밀리고 끌려서 이렇게 됐다고 생각한다. 그 과정에 많은 의인과 고마운 분들이 있었다.”

앞으로의 운영은 어떻게 계획하나. 자녀들이 물려받게 되나.

“공개할 수는 없지만 잘 될 거다. 여기는 40년 독립운동사 최초의 장소다. 누가 독점할 것은 아니다.”

이준 열사의 사망은 극적인 역사였다. 이후 이상설·이위종 역시 고국에 돌아오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이준 열사 방의 침대는 고증을 거친 100년 전의 것이라 그가 누운 장면이 떠오를 정도로 생생하다. 많은 관람객이 작성한 방명록에는 뭉클한 마음이 넘쳐난다.

이에 비하면 관장 부부는 침착하다. “일본을 미워하고 관계를 끊자는 게 아니다. ‘젊은이들아, 목표는 평화란다’라는 이야기를 전하는 게 기념관의 목표다.”

이준 열사 기념관은 영문으로 ‘이준 피스 뮤지엄(Yi Jun Peace Museum)’이다. “헤이그 특사가 참석하려던 국제 회의 역시 만국 ‘평화’ 회의가 아니었던가”라고 이 원장이 되물으며 말했다. “광복 80주년은 그저 한 나라를 원망하는 의미 대신, 암흑 시대를 벗어나 세계의 평화 시민이 될 기반을 갖게 됐다는 의미에서 축하해야 한다.”

Menu

Kollo 를 통해 내 지역 속보, 범죄 뉴스, 비즈니스 뉴스, 스포츠 업데이트 및 한국 헤드라인을 휴대폰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