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독대 숨고, 125년 떠돌다…태극기에 스민 역사

2025-08-10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한강이 5·18 민주화운동을 담은 소설 『소년이 온다』에는 전남도청에서 시민 유해를 수습하는 소년의 시선을 이렇게 묘사한 대목이 있다. “왜 태극기로 관을 감싸는 걸까. 마치 나라가 그들을 죽인 게 아니라는 듯이.”

태극기를 중앙정부 혹은 국가권력과 동일시했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더 깊은 내면에서 민족을 넘어 정의·자유·민주의 상징으로 이 깃발을 품어왔기에 희생자의 관을 싸지 않았을까.

이를 되새기게 하는 ‘박관현 태극기’가 서울 종로구 대한민국역사박물관 3층 전시실에 펼쳐졌다. 5·18 당시 전남대 학생회장으로 옥중 단식투쟁 끝에 사망한 박관현(1953∼1982) 열사의 관을 감싼 것으로 1997년 묘지 이장 과정에서 발견됐다. 광복 80주년 특별전 ‘태극기, 함께해 온 나날들’에 선보인 실물 태극기 18점 중 하나다. 현전하는 가장 오래된 ‘데니 태극기’(1891년, 복제본 전시)부터 2002 한·일 월드컵 태극기 응원까지 관련 유물·자료 210여점을 한자리에 모았다.

태극기가 ‘국기’로 반포된 것은 1883년 1월27일(음력) 조선 고종(재위 1863~1907) 때다. 개항과 더불어 청과 일본은 물론 서양 각국과 통상조약을 맺는 과정에서 독립국가의 상징체로 고안됐다. 흰 바탕 가운데에 청홍이 어우러진 태극이 있고 건·곤·감·리 4괘가 네 귀퉁이에 자리한 것은 동일하지만 1949년 ‘국기제작법고시’가 공포되기 전까지 시대별로 조금씩 도안이 달랐다.

프랑스 국립기메동양박물관이 소장한 이른바 ‘파리 만국박람회 태극기’는 전형적인 초기 양식이다. 세로 97㎝, 가로 102㎝의 흰 광목 바탕에 4괘를 청색 물감으로 그렸다. 조선은 1893년 시카고 만국박람회에 처음 참가한 이래 1900년 파리 박람회엔 ‘대한제국’ 이름으로 참가했다. 당시 대한제국관을 소개한 주간지 ‘르 쁘띠 주르날’의 일러스트에 하늘 높이 펄럭이는 태극기가 보인다. 김현정 전시운영과장은 “기메박물관 측과 끈질긴 협의 끝에 125년 만에 처음으로 국내에 선보인다”고 말했다.

이를 포함해 전시 1실에선 일제강점기의 수난과 애환을 짚어볼 수 있는 태극기를 차례로 만난다. ‘광제호 태극기’는 1904년 만들어진 근대식 군함인 광제호(光濟號)에 게양됐던 것으로 경술국치(1910년 8월 29일)를 하루 앞두고 신순성(1878∼1944) 함장이 거둬들여 남몰래 보관했다. 손자 신용석씨는 “바닷길을 누빈 할아버지의 당부로 할머니께선 태극기를 1년에 한번씩 햇빛에 말리며 보관하셨다”면서 “35년 가까이 마음 졸였을 할머니를 생각하면 눈시울이 뜨거워진다”고 말했다.

당시 조선인들은 다양하게 태극기를 숨겼다. 1908년 개교한 동덕여자의숙(현 동덕여고의 모체) 교정에 걸렸던 태극기는 3·1 운동 직후 상자에 담겨 장롱과 장독대 밑에 보관됐다. 그렇게 감췄다가 수십년 후에 발견된 태극기 두 점도 나란히 선보인다. 2009년 진관사 칠성각을 해체·복원하는 과정에서 나온 ‘서울 진관사 태극기’(보물)는 불단 깊숙한 곳에서 고이 보자기에 싸인 채 발견됐다. 앞서 1996년 전남 장성군 백양사에서 대형 불화(괘불) 보관함 깊숙한 곳에서 발견된 ‘백양사 태극기’는 일제강점기 항일민족교육을 이어갔던 만암 스님(1876~1957, 조계종 초대 종정)의 자취로 파악된다.

중국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임시정부의 의회)에 게양됐던 태극기 3점도 나란히 선보인다. 임시의정원 의장을 지낸 독립운동가 김붕준(1888∼1950)과 그의 아내 노영재가 한 땀 한 땀 바느질해 만들었다고 한다.

광복 후 태극기는 ‘하나됨’의 구심점으로 현대사와 함께 했다. 6·25 전쟁에 참전하는 장병들이 조국수호를 맹세하고 무운을 기원하면서 각자 서명을 남긴 ‘무운장구 태극기’ 한켠엔 안중근 의사를 연상케 하는 손바닥 인장이 뚜렷하다. 1982년 히말라야 마칼루(8463m) 등정 당시 정상에 꽂았던 태극기, 1985년 한국남극관측탐험대가 베이스캠프에 게양한 태극기 등에서 불굴의 의지를 읽을 수 있다.

한수 대한민국역사박물관장은 “태극기에 담긴 기억을 나누며 우리가 지닌 힘과 가능성을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전시는 11월16일까지, 무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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