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조 바이든 행정부가 중국의 ‘인공지능(AI) 굴기’를 막는 제재의 일환으로 고대역폭메모리(HBM)의 수출을 전면 금지하면서 국내 메모리 업계, 특히 삼성전자의 매출 타격이 불가피하다는 우려가 나온다. 삼성전자로서는 중국 손실을 상쇄하기 위해 엔비디아 같은 ‘큰손’과의 거래를 뚫어야 할 필요성도 커졌다.
미국 상부무 산업안보국(BIS)은 2일(현지시간) 반도체 수출통제 조치 개정안을 발표했다. 여기에는 중국을 비롯한 ‘무기금수국’에 내년부터 HBM 수출을 금지한다는 내용이 포함됐다. 구체적으로 ‘메모리 대역폭 밀도’가 평방밀리미터(㎜) 당 초당 2기가바이트(GB)를 넘는 HBM이 대상이다. 현재 생산 중인 모든 HBM은 이 사양을 충족한다.
HBM은 D램을 여러 장 쌓아 데이터 처리 속도를 높인 메모리다. 방대한 데이터를 다루는 ‘인공지능(AI) 가속기’ 등의 고성능 칩에 탑재돼 연산을 보조하는 역할을 한다. 생성형AI 열풍으로 거대 테크 기업들이 AI 인프라에 막대한 돈을 쏟아부으면서 HBM은 메모리 제조사들의 주요 매출처로 떠오르고 있다.
미 상무부의 이번 조치는 해외직접생산품규칙(FDPR)에 근거를 두고 있다. 미국 외 제3국에서 생산된 HBM 및 반도체 장비라도 미국산 소프트웨어·장비 등이 사용됐다면 이를 준수해야 한다. 글로벌 반도체 기업 상당수가 미국산 소프트웨어를 사용하고 있기에 대다수가 적용 대상이다.
국내 메모리 제조사 중 SK하이닉스는 HBM을 거의 전량 미국에 수출하고 있다. 그러나 삼성전자는 중국 판매가 적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 기업들의 AI 열풍과 맞물리면서다. 삼성전자는 5세대 ‘HBM3E’ 같은 최신 제품에서는 SK하이닉스에게 뒤쳐지지만, 레거시(구형) 제품인 HBM2(2세대)·HBM2E(3세대)에서는 안정적인 수율과 공급 능력을 갖추고 있다. 이같은 이유로 화웨이·바이두·텐센트 등 중국 테크 기업들의 주된 ‘사재기’ 대상이 된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로이터통신은 미국 제재를 예상한 중국 업체들의 HBM 구매 행렬이 올 초부터 이어져 삼성전자 HBM 매출의 약 30%를 차지한다고 추정하기도 했다.
삼성전자로서는 중국에서의 매출 감소를 다른 거래선에서 상쇄해야 할 필요성이 커졌다. 삼성전자는 엔비디아에 HBM3E를 납품하기 위한 품질 테스트 과정을 밟고 있다. 6세대 ‘HBM4’ 개발도 진행 중이다.
HBM 제재의 파급력이 우려할 수준은 아니라는 반론도 나온다. 중국에 수출되는 구형 HBM의 단가가 애초에 그렇게 높지 않아서다. 업계 관계자는 “삼성전자의 중국 HBM 매출 비중도 30%까지는 아닌 것으로 알려져 있다”며 “영향은 제한적일 것”이라고 전했다.
다만 미국의 이번 조치가 중국의 HBM 자립 시도를 부채질할 수 있다는 전망이 제기된다. 창신메모리테크놀로지스(CXMT)와 화웨이 등이 HBM2E 개발에 나선 상황이다. 아직 개발에 성공하지는 못했으나 미국 제재로 중국 내 ‘HBM 가뭄’이 현실화된다면 연구·개발 자원을 집중적으로 쏟아부어 조만간 양산 단계로 접어들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