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대(對)중국 반도체 규제를 앞세워 글로벌 메모리 시장의 판도를 뒤흔들고 있다. 한국산 고대역폭메모리(HBM)의 중국 수출을 돌연 금지하는 등 잇달아 반도체 시장 구도를 뒤엎는 규제를 내놓고 있어서다. 반도체 업계 일각에서는 도널드 트럼프 미 행정부 출범 뒤 한국을 대상으로 제2의 미일 반도체 협약이 나오는 것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까지 나오고 있다.
재계의 한 고위 관계자는 3일 “미국이 반도체 시장에서 새 판을 짜기 시작했고 앞으로 TSMC 정도의 슈퍼 갑이 아니면 생존을 장담할 수 없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전 세계 반도체 시장에서 생존을 건 기술 레이스가 시작됐다는 의미다.
미국 상무부는 2일(현지 시간) 이 같은 내용의 중국 수출통제 방안을 발표했다. 미국 정부는 중국의 인공지능(AI) 및 반도체 제조 역량을 제한하기 위한 정책이라고 설명했지만 그 내용을 뜯어보면 납득하기 어려운 규제가 적지 않다.
대표적인 내용이 중국 내 반도체 생산 및 설비 제조 업체 140곳에 대해 수출 금지를 적용하면서 막상 중국 1위의 D램 업체 창신메모리테크놀로지(CXMT)에 대해서는 해외 수출을 허용한 점이다. HBM도 결국 D램을 쌓아 만드는 제품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미국의 조치에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볼 수 있다. 공급이 달리는 HBM은 사실상 미국에만 물건을 팔 수 있도록 제한하고 레거시(구형) D램은 한국과 중국의 경쟁을 유도해 가격을 내리는 식으로 미국 기업의 이익을 최대화한 전략이라는 게 반도체 업계의 분석이다.
가뜩이나 HBM 경쟁에서 밀리고 있는 삼성전자 입장에서는 이번 조치에 따른 타격이 더 클 수밖에 없다. HBM2와 같은 구형 제품이라도 중국에 팔아 라인을 돌리면서 격차를 따라잡아야 하는데 이마저도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반면 중국 메모리 입장에서는 한국과의 격차를 좁힐 수 있는 시간을 번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종욱 삼성증권 연구위원은 “미국 규제에서 제외된 CXMT가 당분간 공격적 설비투자 쇼핑에 나설 것으로 전망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