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관의 퇴임사에서 “평생 법률과 양심에 따라 재판했다”고 하면, 헌법 제103조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에 따른 모범답안이 된다. 그런데 권력의 압력과 달콤한 유혹에도 양심을 지켜 ‘소신껏’ 판결했다거나 ‘양심적인’ 법관이었다고 하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진다. 헌법이 부여한 법관의 의무를 잘못 이해한 것이기 때문이다. 어려운 사법시험을 합격하거나 힘든 로스쿨 과정을 마쳤다고 해서 남을 판단하고 나라의 운명을 결정할 권한을 주는 것이 아니다. 더욱이 공부 잘하는 것으로 ‘착하고 좋은 마음’이란 뜻의 양심(良心)이 갖춰지는 것도 아니다. 이런 혼란이 언어의 문제에서 비롯되었다면 믿겠는가?
일찍이 메이지시대 일본의 번역자들은 ‘conscience’를 어떻게 옮길 것인지를 놓고 고민했다. 그들은 번역 과정의 논쟁을 글로 남겨 추적할 수 있게 했다. 이시즈카 등이 펴낸 번역어 사전에 따르면, 이 단어는 ‘함께’라는 뜻의 ‘con’과 ‘보다’ 또는 ‘앎’이란 뜻의 ‘science’의 합성어인데, 이에 맞는 한자어가 없어 <맹자>에 있는 ‘양심’으로 번역했다고 한다. 일본제 한자어인 양심에 ‘함께’라는 뜻이 빠져 있다고 술회함으로써 번역어의 숙명을 한탄했는데, 일본을 통해 서양의 헌법과 재판 제도를 받아들인 한국에서 그 오역이 남긴 폐해는 너무나 깊고 크다. 우리 헌법은 1963년 법관의 준거 틀로 양심을 명문에 들여왔다.
물론 헌법학자들은 양심을 개인적 양심과 사회적 양심으로 구분하고 법관에게 요구된 양심은 후자라는 데 대체로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다.
그런데, 오역이 없었다면 이런 논의는 불필요한 것이다. 법관이 청렴결백해야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해 헌법의 양심이 이를 의미한다면 군더더기에 다름이 없다. 법관이 따라야 할 양심에 ‘함께 봄’이란 뜻이 들어 있다면 개인적 차원의 ‘소신껏’ ‘양심적’이란 말은 본질을 흐린다. 소극적 선비형으로 법관직을 수행하면 마치 그 역할을 다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어 위험하기까지 하다. 남들이 다 보고 아는 상식은 놓치고 남들이 못 본 것을 보았다고 해서 좋은 법관이 되는 것은 아니다. 과학자나 예술가에겐 좋은 품성이 될지언정 그런 사람이 법관이 된 사회는 불행하다.
“내 양심은 하나님 말씀에 사로잡혀 있다. 나는 내가 한 말을 취소할 수도 없고 하지도 않겠다. 왜냐하면 양심에 반해서 행하는 것은 안전하지도 않고 현명한 일도 못 되기 때문이다.”
이 말은 1521년 4월18일 독일의 보름스에서 열린 재판에서 본인이 한 말을 취소하라는 요구에 대해 마르틴 루터가 대답한 최후진술이다. 파문을 각오하고 신앙의 양심을 지킨 종교인은 이래야 한다. 그러나 법관은 자신의 소신이 정의와 유리된다면, 적극적으로 유체 이탈하여 사회정의를 추구해야 한다. 법관 자신의 종교적 신념과 다르더라도 양심적 병역거부를 한 피고인에게 무죄를 선고하는 것이 좋은 예이다.
정의로 치환될 수 있는 ‘함께 봄’이란 뜻의 양심은 ‘지켜야 할’ 대상이 아니라 ‘추구해야 할’ 대상이다. 법관은 이 시대, 한국이란 공간에서,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이 추구해야 할 ‘가치’와 ‘정의’가 무엇인지 찾아야 한다.
광장은 둘로 쪼개져 있다. 군중의 수로 정의를 정할 수는 없다.
흔히 법관은 판결 선고 후 역사의 법정에서 피고인이 된다고 한다. 판결 선고에 앞서 머지않은 미래 열릴 역사 법정의 피고인석에 미리 앉아보기를 권한다. 그리고 그 시점에서 과거인 2025년 봄을 돌아보아 개인의 소신과 ‘함께 봄’이 같았는지, 달랐다면 개인에서 빠져나와 정의를 추구했는지 숙고하고 다시 돌아와 오늘을 판단하기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