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슬픈 장면이 아니에요. 더 즐겁게!”
지난 25일 강릉시 순포해변, 영화 <청명과 곡우사이>의 촬영 현장. 배우 박정자(83)가 확성기를 잡은 채 150여명의 사람들을 향해 외쳤다. 사람들은 박정자의 뒤를 따라 걸으며 놀이패의 북과 꽹과리, 장구 장단에 맞춰 어깨춤을 췄다. “여러분 즐거우시죠? 신나는 마음으로 선생님을 보내드리는 시간입니다!”라는 감독 유준상(56)의 말에 사람들은 “네”하고 호응했다.
배우로 더 잘 알려진 유 감독의 다섯번째 장편영화인 <청명과 곡우 사이>는 대지에 봄기운이 가득한 절기 청명(淸明)과 곡우(穀雨) 사이, 삶과 죽음을 생각하는 박정자 배우의 이야기를 담았다. 기억을 잃어가는 80대 여배우 ‘그녀’의 죽음의 순간과 장례까지를 다뤘다.
이날 촬영 장면은 ‘그녀’의 장례식 신으로, 영화의 하이라이트이자 마지막 장면이다. 박정자는 보조출연자들을 섭외하는 대신 지인 150여명을 불렀다. 영화의 한 장면이지만 박정자가 실제 지인들을 조문객으로 초청하면서 일종의 ‘생전 장례식이 된 것이다. 박 정자는 “(장례식) 리허설”이라고 했다.

꽃무늬 원피스에 빨간 구두를 신은 박정자가 춤을 추며 자신의 상여 행렬을 이끌었다. 조문객들은 박정자가 연극 인생 63년 동안 출연했던 <위기의 여자>, <19에서 80>, <세자매>, <페드라> 등 100여개의 작품명이 적힌 만장을 흔들었다. 소프라노 임선혜의 벅차도록 슬픈 노래가 흘렀지만, 사람들은 웃으며 어깨춤을 췄다. 유쾌한 작별의 순간이었다.
유 감독의 ‘컷’이라는 목소리와 함께 촬영이 끝난 현장에서 조문객들로 출연한 지인들과 인사를 나누며 크게 웃고 반갑게 대화했다. 지인들은 “언제 또 보러 올 거냐”며 어깨를 흔들거나 기념사진 한 장 찍자며 박정자를 잡아끌기도 했다. 소감을 물어보는 말에 박정자는 북받친 듯 “지금은 (소감을) 말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앞서 박정자는 지난주 지인들에게 ‘박정자의 마지막 커튼콜’이라는 부고장을 보내 “이것은 작별이 아니라 쉼이며 끝이 아니라 막간” “당신은 우는 대신 웃어야 한다”이라고 했다. 배우 강부자, 배우 양희경, 배우 오지혜, 뮤지컬 배우 김호영, 김동호 전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 김용호 사진작가 등 지이인들은 촬영 전날인 지난 24일 전야제부터 이날 장례식까지 함께 했다.
강부자(84)는 “박정자를 처음 봤을 때 ‘어떻게 저런 애가 배우를 하나?’라고 생각했다는 농담을 어제 전야제에서 했더니 모두 크게 웃었다”며 “나도 늘 내가 죽으면 관에 작은 틈으로 누가 오는지, 부조를 얼마 하는지 궁금했었는데 이런 자리가 실제로 이뤄졌다는 게 기쁘다”고 말했다.
뮤지컬 배우 김호영은 “갑자기 맑아진 날씨가 ‘박정자’스럽다. 냉정과 열정 사이 있는 선생님을 닮았다”며 “나도 언젠간 상복이 없는, 파티 같은 장례식을 치르고 싶었는데 선생님께서 이런 자리를 마련해주셔서 정말 감사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틀 간의 행사를 마친 박정자는 “나의 삶을 배웅하는 사람들을 내 눈으로 보게돼 행복하다”며 “헤어지는 장면도 꼭 축제처럼 해보고 싶었는데, 웃으면서 보내주고 떠날 수 있어서 너무 좋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