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료의 힘이 막강하던 시절, 기업인들의 ‘군기’를 잡는 몇 가지 방법들이 있었다. 가장 고전적인 게 소집령이다. 간담회나 면담을 명분으로 청사로 불러들인 뒤 앉을 자리도 없이 몇 시간씩 기다리게 하는 게 예사였다. 한 금융사 최고경영자의 회고다. “담당 과에서 갑자기 회의를 소집해 기존 스케줄 다 취소하고 과천 청사로 향했다. 교통 체증을 뚫고 간신히 남태령을 넘을 즈음 사무관이 ‘과장님이 다른 일정이 생겨 회의가 취소됐다’고 통보하더라. 회사로 되돌아오는 길에 얼마나 자괴감이 들던지….”
대통령 ‘떡볶이 먹방’ 떠올리게 한
이재명 대표의 시중 은행장 소집
민생 내세운 제왕적 행태 닮은꼴
이게 단지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일일까. 여전히 권력기관들은 민간 기업에 소집령을 내린다. 윤석열 정부 들어 오히려 심해졌다는 게 기업인들의 이구동성이다. 그도 그럴 것이 대통령실부터 기업인을 동원하는 걸 즐겼다. 대통령의 해외 순방에 주요 그룹 총수들의 동행이 눈에 띄게 잦았다. “우리는 그쪽에 벌여놓은 사업도 없고, 다른 해외 일정도 있다”며 눈치를 보던 기업들이 출국이 임박해서야 수행단 참여를 결정하기도 했다. 또 용산에서 열리는 중소기업인 대회 같은 행사엔 당사자도 아닌 주요 그룹 회장들이 꼬박꼬박 참석했다. 이전 정부에선 볼 수 없었던 일이다.
압권은 2023년 말 윤 대통령의 부산 재래시장 방문이었다. 총선을 앞두고 부산 엑스포 유치 실패로 지역 민심이 싸늘하던 때였다. 그날 윤 대통령은 말끔한 정장 차림의 총수들을 병풍 삼아 ‘떡볶이 먹방’을 벌였다. 해외 순방 동행이야 최소한 ‘국익’이라는 명분이라도 있었다. 하지만 이건 아예 발가벗고 기업인들을 국내 정치에 활용한 것이나 마찬가지였기에 큰 논란이 일었다.
이 그로테스크했던 장면이 다시 떠오른 건 20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시중 은행장들을 불러모았다는 소식을 듣고서다. 정치적 이해에 기업인들을 병풍처럼 동원하는 방식이 너무나 유사하다는 생각에서다. 명분은 민생을 챙기겠다는 것이지만 실효 없이 부작용만 키울 수 있다는 것 역시 닮은꼴이다.
이날 간담회가 논란이 되면서 이 대표의 발언은 예상보다 신중했다. 하지만 지금처럼 혼란한 상황에서 금리인하를 압박해 온 야당의 대표가 은행장들을 불러모으는 게 시장에 어떤 시그널을 줄지 고민이 필요했다. 그렇지 않아도 대외 신인도가 흔들리며 외국인이 국내 주식과 채권을 내던지고, 환율은 치솟고 있지 않나. 정부는 물론 한국은행, 금융지주사 회장들까지 나서 “정치와 달리 경제는 시스템으로 돌아간다”며 해외 투자자들을 설득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민감한 판국에 시장을 들쑤시는 건 극히 위험한 일이다. 자칫 금리 조금 내린 것 이상의 부담을 대출자에게 안길 수도 있다.
사실 8일 이 대표가 외환시장을 점검한다며 한국은행 관계자를 호출할 때부터 좀 불안했다. 국회가 공식적으로 부르는 게 아니라면 기획재정부 담당 관료의 설명을 듣는 것으로 족했다. 한은은 정치적 독립성이 중요한 기관이고, 간담회에 참석한 간부는 직접 외환시장 개입을 실행하는 말 그대로 ‘외환당국’이다. 외환시장의 움직임을 세계 각국이 감시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런 모양새는 외환 관리에게 부담만 줄 뿐이다. 한은 측이 이날의 이례적 간담회에 대해 “특별한 요구는 없었고, 상황만 보고했다”며 말을 아낀 것도 이를 의식해서였을 것이다.
앞서 칼럼에서 필자는 비상계엄과 이어진 탄핵 정국은 ‘정치판 외환위기(IMF 사태)’나 다름없다고 했다. 그 구조적인 원인을 놓고 한편에선 무소불위의 ‘제왕적 대통령’이 문제라고 하고, 다른 편에선 그런 대통령마저 꼼짝 못 하게 만드는 국회 권력이 더 큰 문제라고 반박한다. 논란이 분분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있다. 적어도 기업에는 둘 다 ‘제왕적’이란 것이다. 각종 규제와 처벌 수단을 쥐고 있는 대통령이야 말할 게 없다. 하지만 요즘은 입법권을 틀어쥐고 야당도 그에 못지않다. 최근 야당이 입법을 시도한 ‘국회 증언감정법’은 관치 시대 ‘기업인 소집령’의 국회 판이나 다름없었다.
요즘 우리 기업인들, 그렇지 않아도 많이 힘들다. 사실상의 무정부 상태에서 트럼프 행정부 출범이란 외풍까지 온몸으로 맞고 있다. 정치권의 압박에도 은행들은 그나마 적당한 출구를 찾을 것이다. 금융감독원의 ‘불러 조지기’와 관치에 워낙 이골이 나 있으니 말이다. 정말 걱정스러운 건 탄력을 받은 야당이 민생을 내걸고 본격적으로 기업인들을 호출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자기 살기에도 바쁜 여당이 이를 견제하길 기대하기도 어려워 보인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한 얘기를 정치권에 다시 한번 할 수밖에 없다. “제발 나라 경제 생각 좀 하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