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인숙의 프랑스 문학 살롱 이야기] 프랑스 살롱의 진화와 그 풍경

2025-05-19

'시대에 따라 변화한 살롱'

이번 편에서는 프랑스 문학 살롱의 내부를 구체적으로 묘사해 보고자 한다. 18세기 계몽주의 시대에 만개한 파리 살롱은 시기별로 그 풍경과 역할이 조금씩 달랐다. 먼저, 1730년 살롱은 여전히 가족 분위기의 모임이 주를 이루었다. 무도회 다음 날의 고요하고 행복한 평온함이 만들어내는 즐거움을 만끽하는 친밀한 모임이었다. 천정이 높고 동양풍의 카펫이 깔린 마룻바닥의 넓은 방에서 무릎을 꿇고 작고 긴 털을 가진 강아지 비숑을 안고 몸을 녹이거나 허리를 굽혀 손가락으로 음악책을 넘기는 여성들을 볼 수 있었다.

17~18세기 프랑스에서 유행했던 스페인의 카드 게임(hombre)을 하며 나른하게 웃고 있는 젊은 여성부터 의자에 돌아 앉아 실타래로 고양이를 괴롭히며 즐거워하는 여성까지 다양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온유함, 기쁨이 이곳을 지배하였다. 가면무도회의 두건 달린 옷을 입은 남자 옆에 가면이 놓여 있기도 하였다.

그러나 1760년부터 살롱의 분위기는 변화하면서 빛과 소음으로 가득하였다. 금색이나 은색으로 수놓아 장식한 실크 직물이 문 위에 조화롭게 주름을 잡았고 연인들은 장난치고 즐겁게 놀았다. 촛불로 빛나는 보헤미안 크리스탈 샹들리에가 천장을 장식하고 문을 열면 독일식 그릇에 예술적으로 배열된 과일 피라미드가 가득한 뷔페가 펼쳐졌다.

이때 살롱의 가장 활기찬 즐거움은 무도회였다. 살롱 한가운데서 날씬한 기사들이 경쾌한 댄서들과 함께 춤을 추고 있고, 여자들은 부채질을 하며 서로의 귀에 대고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누었다. 안락의자 위로 둥글게 둘러선 기사단은 젊은 처녀들에게 구애를 보내고 페치카 옆에는 노인들이 모여 추억을 회상하며 아이들의 손에 오렌지를 떨어뜨렸다.

루이 15세 시대의 이러한 살롱 분위기는 루이 16세 시대로 접어들면서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현재를 향해 열려 있는 것처럼 보였던 루이 15세 시대의 살롱과는 달리 루이 16세 시대의 살롱은 미래를 향해 열려지고 있었다. 벽과 건축물은 궁정과 마찬가지로 사회와 마찬가지로 개혁으로 인해 슬픔에 잠겨 있었고 즐거움과 오락이 진지함과 냉철함으로 대체되고 있었다.

짝을 지은 남녀는 더 이상 보이지 않고 여기저기 그룹이 형성되고, 게임 테이블에서는 두 명의 여성이 한 남성과 대결하고 카드를 보여 주며 옆 사람과 이야기하고, 삼각 트랙 테이블에서는 코넷을 들고 한 여성이 수도원장과 함께 연주하였다. 벽난로에 기대어 또 다른 여성이 대화를 나누었다. 창가에서는 한 젊은 여성이 책을 읽고 있었다. 여전히 상류 사회이지만 더 이상 쾌락적인 분위기는 아니었다. 이 살롱에서는 혁명의 공기가 익어가고 있었다. 살롱은 순간에 따라 다소 문학적이기도 하였지만 때로는 약간 정치적이기도 하였다.

프랑스의 역사는 오랫동안 살롱과 계몽주의, 계몽주의와 혁명 사이에는 인과적 연관성이 있다는 이중 패러다임을 확신하여 왔다. 토크빌은 문인들이 자주 찾는 살롱이 혁명을 촉발했다는 사실에 슬퍼하기도 하였다.

'살롱, 프랑스인들의 매너 교습소'

이처럼 살롱의 개념은 세월과 더불어 진화해 왔지만, 그 기본 원칙은 변함이 없었다. 살롱을 통해 자랑스럽고 우아하고 품위 있는 18세기의 세련된 프랑스, 즉 1789년까지 모든 국가 취향의 본고장으로서, 모든 국가의 매너 교습소로서, 인간 도덕의 모델로서 유럽의 다른 국가들보다 우위에 서게 될 사교 모임이 형성되고 구성되었다.

살롱은 이 시대 프랑스의 가장 위대한 기관의 기초였으며, 혁명이 일어날 때까지 강력하게 유지된 기관이었다. 모든 도덕법이 불신 받는 가운데서도 통치의 권위를 유지한 유일한 기관이었다.

‘완벽하게 좋은 어울림’을 목표로 한 살롱은 나쁜 어울림, 통속 사회, 촌스러운 공동체와 차별화하는 일종의 협회로 섬세함과 상냥함, 절차의 의무, 배려의 기술, 칭찬, 예의범절을 연마하는 장으로써 역사를 썼던 것이다. 살롱의 품위 있는 예의, 매너, 에티켓, 좋은 어울림은 프랑스의 대화 문화로 자리 잡아 갔다.

새로운 교리가 많은 반향과 박수를 받고, 활기찬 열정과 따뜻한 우정의 격려로 가득 찬 귀족들의 문화를 살롱 여주인들은 철학자, 수학자, 문인들의 항의와 저항, 분노의 집결지로 만들어 나갔다. 그녀들은 대화를 아름답게 이끌고, 문자를 배양하고, 문학을 사랑하고, 심지어 문인으로까지 이름을 떨치기도 하였다.

'이어진 국내외 명사들의 찬사'

살롱에서 대화의 예술은 그 정수를 보여주었다. 볼테르는 “모든 언어 중에서 프랑스어는 정직한 사람들의 대화를 가장 쉽고, 깔끔하고 섬세하게 표현하는 것으로, 이는 유럽 전역에서 삶의 가장 큰 즐거움 중 하나에 기여한다”라고 기술하였다.

1784년 6월 3일 앙뚜안 드 리바롤(Antoine de Rivarol)이 베를린 아카데미 대회에서 1등을 차지한 것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때 그는 ‘프랑스어의 보편성에 관한 담론’에 대한 에세이를 발표하였다. 유럽 대륙의 지배적인 언어들이 프랑스어를 대체할 수 없는 이유를 그가 설명하였다. 이를 베를린 아카데미는 높이 평가하였던 것이다.

살롱들은 각각 다른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고 여주인들은 살롱이 원하는 방향, 그녀들의 선입견과 취향에 따라 손님을 선택하였다. 살롱과 그곳을 지배했던 그녀들의 정신은 외국인들에게도 칭송을 받았다.

이탈리아의 지식인 카라치올리(Caraccioli)는 “이 얼마나 아름다운 나라인가!”라고 외치며, “그들이 말하는 모든 것이 훌륭하고, 그들이 하는 모든 것이 노련하다”라고 극찬하였다. 러시아 여행자 카람진(Karamzine)은 “프랑스인은 사회를 발명했거나 사회를 위해 발명된 것처럼 보일 정도로 인간과 함께 사는 예의와 기술이 타고난 것 같다”는 말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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