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달래빛 벌판 왼쪽에 오렌지색 길, 그 위에 연노랑 산. 붓자국 남아 있는 색면 추상에서 묘하게 풍경이 읽힌다. 재독화가 윤종숙(60)의 ‘진달래’다. '구름 한 점'은 화면에 흰 구름, 회색 구름이 걸린 듯하고, '나의 고향'은 황톳빛 구릉 위에 시내가 흐르는 듯하다. 15점의 색면 추상에 서정적 제목이 붙어 기억 속 아스라한 풍경을 이뤘다. 서울 창성동 리안갤러리에서 다음달 28일까지 여는 윤종숙 개인전 ‘봄(Bom)’이다. ‘봄(Spring)’이 아니다. ‘산(San)’, 고향인 ‘아산(Asan)’도 그렇다. 독일 뒤셀도르프에서 활동하는 그는 이런 우리말 제목을 즐긴다.

윤종숙은 1965년 충남 온양(지금의 아산)에서 태어났다. 15일 전시장에서 만난 그는 “개울가 있는 집에서 자랐어요. 맞은편 야트막한 산 이름이 설화산, 4월까지 꼭대기에 눈이 쌓여 있었어요. 봄에는 진달래로 온통 분홍이었죠. 그걸 따서 엄마가 지짐이를 만들어주셨어요. 그게 얼마나 아름다운 추억이었는지 그땐 몰랐죠.” 스케치도, 미리 정해둔 제목도 없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긁어내고 새로운 색을 얹는다. “그리다 지우지만 오류ㆍ실수와는 다르다. 예술에 실수는 없다. 계획과 다른 흔적들이 작품을 강하게 만든다”고 설명했다. 캔버스에 레이어가 쌓이고, 그날그날의 감정이 화면에 스며든다.

이런 즉흥성으로 밑그림 없는 벽화 작업도 즐긴다. 158㎝ 작은 키로 사다리에 매달려 큰 붓을 휘두른다. 국립현대미술관 청주에서 9월 7일까지 열리는 ‘수채: 물을 그리다’ 전시장 곳곳에 과슈(불투명 수채) 벽화를 그렸다. 제목은 ‘아산’, 고향 풍경에 대한 기억이다. 오스트리아 빈 현대미술관(Mumok) 로비의 영구설치 벽화 ‘금강산’도 있다.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곳에 대한 화가의 인상기다.

윤종숙은 30년 넘게 독일에서 지내고 있다. 그림도 여기서 처음 배웠다. 교육학을 전공한 그를 바꾼 것은 1990년 서울 워커힐미술관에서 본 독일 현대미술전. 게오르그 바젤리츠, 안젤름 키퍼, 로즈마리 트로켈의 작품을 처음 봤다. 독일을 가야겠다 싶었다. 뒤셀도르프 쿤스트 아카데미 복도에서 본 '프로페서 남준백'이라는 명패가 그를 이끌었다. 2001년 졸업할 때까지 백남준을 볼 기회는 없었다. "한국 교수님의 이름이 타지에 대한 두려움을 줄여줬죠. 이미 너무 유명한 분이고, 주로 뉴욕에 계셨던 건 나중에 알았어요."

유진상 평론가는 "윤종숙의 그림은 세계의 단면을 하나의 프레임 안에 추상화한다"고 말한다. 영화가 초당 24개의 프레임으로 시간의 연쇄를 구성한다면, 그의 그림은 하나의 정지된 프레임에 수많은 기억과 감각을 집약한다는 얘기다. 과거의 풍경, 뇌리에 떠오른 장면을 불러내며, 구체화하기 전의 감정과 미세한 떨림이 거대한 얼룩으로 표현된다. 윤종숙은 “내가 앞으로 어떤 인생을 살고 어디까지 가느냐는 지금의 내가 정한다. 작업실에만 있다 보면 때론 살과 피가 녹는 듯 괴로우면서도 행복하다. 이런 삶이 바로 사치”라고 말했다.

뉴욕 마리안 굿맨 갤러리는 15일(현지시간) “윤종숙 작가의 영입을 알리게 돼 기쁘다”며 “기억 속 장면이나 사진에서 영감을 받은 다양한 풍경을 주관과 감정에 따라 자유롭게 표현하는 화가”라고 밝혔다. 1977년 설립한 마리안 굿맨은 마우리치오 카텔란, 피에르 위그, 토니 크랙 등을 전속작가로 둔 굴지의 화랑이다. 윤종숙은 이곳 첫 한국 전속 작가다. 윤종숙은 “작가로서 높이 날고 싶다. 내 그림에 좋은 삶을 주고 싶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