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이 내리기 시작한 17일 저녁. 서울 역삼동 GS아트센터 3층 로비에서 입장을 기다리던 관객들 사이로 중세 유럽의 수도사 혹은 사신처럼 보이는 길고 검은 옷의 남성이 서서히 걸어 들어왔다. 그의 허리에는 총알 모양의 벨트가 감겼고 작은 종과 금속 메달 등 장신구가 매달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은은한 종소리가 울렸다. 사신의 낫 대신 기다란 붐 마이크를 손에 쥔 남성은 긴 줄을 선 관객 사이를 이동하며 때로는 마이크를 관객에게 향하기도 했다. 지금부터 죽음의 세계로 초대하겠다고 말하는 듯한 그의 몸짓을 따라 관객들도 자연스레 검은 장막이 드리워진 비일상의 공간으로 들어섰다.
유럽 공연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예술가 중 한 명인 스페인의 안무가 마르코스 모라우의 최신작 ‘죽음의 무도 : 내일은 물음이다’는 이처럼 시작부터 특별한 인상을 남겼다. ‘죽음의 무도’는 흑사병이 창궐했던 중세 유럽에서 유행했던 죽음(해골)이 춤추는 도상 ‘토텐탄츠(Totetanz·죽음의 춤)’를 현대의 무용 언어로 소환한 작품이다. 특히 ‘죽음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하다’는 토텐탄츠의 철학을 강조하기 위해 무대가 아닌 장소에서 열리도록 기획됐다. 무대의 높낮이를 없애 관객과 무용수가 같은 눈높이에서 호흡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지난해 이탈리아 밀라노 박물관에서 초연된 작품은 스페인의 레이나 소피아 미술관과 카탈루냐 성당 등 다양한 장소에서 공연되며 호평을 받았다.
이번에는 도심 빌딩 속 로비라는 새로운 장소에서 어떤 맥락의 춤을 선보일지 관심이 쏠렸다. 제작진의 선택은 로비의 일부에 검은 장막을 설치해 의식을 위한 공간을 새로이 창출하는 것이었다. 대형 박물관이나 미술관과 비교해 넓지 않은 공간이지만 그만큼 관객들과 무용수 간의 거리는 좁혀졌다. 무용수들의 호흡과 옷자락이 펄럭이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가까웠다. 실제 무용수들도 공연 중 관객에 다가가 손을 맞잡거나 물건을 건네고 때로는 관객의 손을 이끌어 심장 박동을 느끼게 하는 식으로 교감하며 몰입을 이끌었다.
공연의 시청각적 인상도 강렬했다. 향이 피어오르는 향로, 수술대가 연상되는 철제 탁자, 인형의 육체 등 죽음을 은유하는 시각적 이미지가 넘쳐 나는 이 의식의 공간에서 검은 의복 차림의 세 남성과 머리카락까지 새하얀 순백의 여성이 강력한 에너지로 흩어졌다 뭉치기를 반복했다. 마치 삶과 죽음의 대화 같았다. 또 불현듯 켜지는 새빨간 조명 안에서 기괴하게 뒤틀리고 꺾이는 무용수들의 몸짓은 죽음이라는 공포와 불안을 불러오는 동시에 기이할 정도로 강렬한 에너지를 전달하며 눈길을 사로잡았다.
1시간 공연의 클라이맥스는 로비의 대형 스크린을 통해 온갖 죽음의 스펙트럼이 전시되는 순간 찾아온다. 비트 강한 전자 음악을 배경으로 도널드 트럼프 등 현대 권력자들의 얼굴과 전쟁의 참상, 사고로 인한 일상의 죽음과 영화 속 잔혹한 죽음 등이 빠르게 교차하는 영상은 오늘날에도 중세의 광기 어린 ‘죽음의 춤’이 결코 끝나지 않았음을 알려준다. 동시대의 예민한 이야기를 감각적으로 전달하는 모라우의 연출력이 돋보이는 장면이다.

4월 개관한 GS아트센터의 개관 기념 공연으로 마련된 무대는 17·18일 단 두 차례 각각 100명의 관객에게만 열렸다. 올해 43세인 안무가 모라우는 23세에 설립한 예술단체이자 자신의 안무 언어를 가장 잘 이해하는 ‘라 베로날’과 함께 내한해 이번 무대를 직접 연출했다. 그는 “지금 유럽은 전쟁과 불법 이민 등을 둘러싼 사회적 소용돌이에 있는데 이런 상황에서 죽음에 대한 생각이 우리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들여다보고 싶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