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기 때문에

2025-10-15

엄혹하던 80년대. 덥수룩한 머리를 한 젊은이가 평소 다니던 성당 앞에 있는 작은 레코드 가게를 방문한다. 젊은이는 평소 음악을 좋아하여 밴드 활동을 하면서 노래를 즐겨 불렀다. 가끔은 노래를 작곡해 보기도 했는데 그날따라 젊은이는 레코드 가게 사장님에게 자신이 작곡한 노래를 들려주고 싶었다. 가게 사장님은 카세트테이프에서 그 젊은이가 작곡하고 녹음한 여러 노래를 듣더니 그중에서 한 노래가 좋다고 했다. 사장님은 그 노래를 가지고 나중에 가수가 되어보라고 권유했다. 레코드 가게의 사장님 응원 덕분이었는지 아니면 레코드 가게 앞에 있던 성당의 은총이었는지, 젊은이는 당시 최고의 음악프로그램이던 ‘젊음의 행진’까지 출연한다. 그 젊은이는 바로 가수 유재하이다.

젊은 날 사랑했던 유재하 노래

순수함 돌아보게 하는 ‘보양곡’

가을은 침묵이 어울리는 계절

과거 기억하는 모든 행위가 기도

유재하의 데뷔 프로그램인 ‘젊음의 행진’에서 부른 노래는 ‘내 마음에 비친 모습’이었지만, 유재하를 세상에 알린 노래는 ‘사랑하기 때문에’라는 곡이다. 25살이라는 짧은 나이에 하늘로 돌아간 가수 유재하의 첫 번째 앨범이자 마지막 앨범의 타이틀 곡인 ‘사랑하기 때문에’는 이렇게 노래한다.

“처음 느낀 그대 눈빛은 / 혼자만의 오해였던가요 / 해맑은 미소로 나를 바보로 만들었소 / 내 곁을 떠나가던 날 가슴에 품었던 / 분홍빛의 수많은 추억들이 / 푸르게 바래졌소”

마주친 눈빛 하나로 자신의 삶 그 어디에서도 느끼지 못한 감정이 솟구치게 만들 수 있는 것. 내가 던진 시답지 않은 농담에도 누군가 웃음 짓고 오히려 누군가가 지어준 해맑은 미소 때문에 나를 바보로 만들 수 있는 것. 삶의 무게로 하늘마저 어둡던 날에도 그대와 함께한다는 이유 하나로 다시 세상을 분홍빛으로 만드는 것. 그것을 가수 유재하는 사랑이라고 노래한다. 이 신비로운 일들이 모두 사랑하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노래한다.

맞는 계절에 먹어야 맛이 나는 제철 음식이 있고 그 계절에만 맛볼 수 있는 제철 과일이 있듯이, 노래도 그 계절에 부르고 들어야 하는 제철 노래가 있다. 나의 가을 제철 노래는 유재하의 ‘사랑하기 때문에’이다. 스산한 바람이 부는 가을에 듣는 ‘사랑하기 때문에’는 나의 오장육부에 원기를 다시 불어넣어 주어 영육 간의 건강을 다시 찾아주는 보양식과 같은 보양곡(保養曲)이다.

무엇보다 이 노래가 나의 보양곡인 이유는 나의 순수함을 돌아보게 만들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빨리 지나가 삶이 덧없이 느껴지는 순간에 나의 마음을 뜨겁게 채우던 사랑이 있었음을 다시 꺼내 보는 일은 마음을 따뜻하게 만든다. 떠나간 이가 다시 돌아올 날을 기다리며 오늘을 살아가는 바보는 살아보니 그 같은 사랑이 세상에 다시 없었다고 실망하지 않는다. 유치하리만치 순수한 사랑을 간직했던 시절이 누구에게나 있었음을 확인하는 일은 소중한 일이다. 세상 풍파에 하도 시달려 사라진 줄 알았던 ‘순수함’이 내 마음 깊은 곳에 있음을 발견하는 일 자체가 기도이며 고해성사이다.

가을이다. 뜨겁던 온기는 사라지고 스산한 바람이 도시의 거리를 채운다. 하늘을 가득 채우던 성당의 종소리도 땅으로 내려와 가장 낮은 곳들을 채운다. 언제나 푸르른 줄 알았던 나무도 하나둘 낙엽으로 몸을 가볍게 만들며 겨울 채비를 서두른다. 봄 여름 고맙게 잘 입었던 옷들을 창고에 정리해 두고 옷장 한켠에 넣어두었던 가을 겨울옷들을 다시 꺼내 입는다.

이런 가을에는 기도하게 된다. 어느 때보다 높아진 하늘을 바라보며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으게 된다. 사랑마저 쟁취하겠다며 속도전으로 살던 어제가 아닌, 화려한 파티는 끝나고 쓸쓸한 빈 잔들이 거리를 뒹구는 시간이 바로 가을이다. 하나라도 지지 않을 것이라며 고래고래 소리치던 어제가 아니라 신의 목소리라는 침묵이 여름날의 해변을 가득 채우는 시간이 바로 가을이다. 그 가을에 우리는 어제를 돌아보며 나의 순수함를 발견하는 기도를 하게 된다.

그래서 나의 순수함을 찾아가는 일이 기도라고 하면, 기도는 언제 어디서나 할 수 있다. 나의 마음을 다시 순수하게 만드는 노래를 듣거나 글을 읽어보는 일이 기도이다. 촬영하기 바빴던 스마트폰의 사진이나 영상들을 정리하는 일이 기도이다. 서로 뽐내기 바쁘던 각자의 SNS의 게시물을 정리하는 일마저도 기도이다. 옛날부터 내 마음 한 곳에서 언제나 나와 함께 있는 순수함, 사랑, 아름다움을 천천히 빠르지 않게 각자의 방법으로 찾아가는 모든 일이 기도이다. ‘기억(anamnesis)’해내는 모두 일이 기도이다.

가을, 나는 유재하의 노래를 듣는다. 잊고 지낸 마음의 온기를 기억하려고 한다. 나의 순수함을 만나려고 한다. 다시 돌아올 그대를 사랑하기 때문에.

조승현 가톨릭평화방송 신문(cpbc) 보도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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