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USC 공동기획
힐링캘리포니아 프로젝트
알코올·도박 중독, 고독사 위험 커
죽음 이야기 외면하는 문화 바꿔야
“존엄한 죽음 본인이 숙고하고 준비”
#. 얼마 전 LA한인타운 대한장의사에서 한인 독거노인의 쓸쓸한 장례식이 열렸다. 70대인 한인 남성 A씨는 가족과 연락도 끊긴 채 살다가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았다. A씨를 알고 지내던 한 교회 목사가 가족을 수소문했지만 찾지 못했다. 결국 A씨의 시신은 이 목사의 도움으로 염과 화장만 하는 간단한 장례를 치를 수 있었다.
한인 장례업계에 따르면 한인 고독사는 생각보다 많다. 대부분 준비 없이 갑작스럽게 당하는 죽음이다. 한인 고독사는 60~70대 전후 남성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노인아파트, 하숙집 등에서 홀로 죽을 때가 많다.
특히 한인 고독사 이면에는 각종 중독 등 정신건강 문제가 자리 잡고 있다. 고독사한 이들 대부분 가정이 파괴된 채 쓸쓸히 생을 마감한다. 한인 고독사는 남성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대한장의사 미카엘 이 대표는 “우리 장례식장에서 1년에 한인 7~8명 정도 고독사 장례를 치른다”면서 “이들 중 돌아가실 때 돈 한 푼 없는 분들도 있다. 대부분 알코올 중독, 도박 중독 등 정신건강 문제를 앓다가 가족에게도 버림받은 경우”라고 전했다.
장의사로 수많은 죽음을 접한 이 대표는 ‘죽음 준비’를 강조한다. 그는 “교회 등에서 강연 부탁하면 ‘80 전후는 항상 죽을 수 있다는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당부한다”며 “살아 있을 때 유언장 등을 작성하고, 최소한의 장례식 비용(1700~4000달러)이라도 준비하면 장례 후 가족의 불화도 막을 수 있다”고 말했다.
▶죽음 이야기 피하지 말자
한국 문화에서 죽음을 준비하는 자세는 낯설게 비칠 때가 많다. 한솔장례생명보험 황선철 대표는 “한인 등 동양 문화권은 저승보다는 이승의 삶을 중시해 죽음을 미리 준비하려는 자세를 잘 안 보인다”고 말했다.
2007년 창립한 소망소사이어티는 한인사회의 죽음에 대한 인식변화를 목표로 활동을 시작했다.
소망소사이어티는 ‘아름다운 삶, 아름다운 마무리’를 위해 ‘웰빙, 웰에이징, 웰다잉’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치매 진단과 대처법, 사전의료지시서 및 시신 기증 서약서 작성은 가장 중요한 활동이다. 시니어들이 주축이 된 이 단체는 시니어 스스로 치매 등 신체건강을 제대로 파악하고, 정서적 안정을 가져다주는 죽음 준비에 나서자고 강조한다.
소망소사이어티 유분자(89) 이사장은 “한국 문화가 죽음에 대해 서로 이야기하기를 금기시한다”면서 “이제는 책상 밑에 숨겨 뒀던 죽음이라는 이야기를 책상 위에 올려놓고 진지하게 소통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고 갑자기 죽으면 가족 등 모두가 당황한다”고 말했다.
시니어 스스로 죽음을 준비하는 자세는 정신건강에도 긍정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LA카운티 정신건강국 최영화 시니어 커뮤니티 헬스워커는 “한인사회에는 죽음에 대해 부정적 인식이 높다”고 전제한 뒤 “죽음을 대하는 긍정적인 생각과 태도는 시니어 정신건강과 웰빙 측면에서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태도, 하루하루를 더 소중하게 생각하는 기회를 얻게 해준다. ‘나이가 들어 쓸모가 없다’는 의기소침을 극복하고, 주변의 소중한 사람과 더 좋은 관계도 맺을 수 있다”고 말했다.
▶존엄한 죽음, 준비와 선택
웰다잉 인식확산을 위해 소망소사이어티는 사전의료지시서(Advanced Healthcare Directive) 작성 캠페인을 꾸준히 벌여왔다. 본인 스스로 원하는 죽음의 방식, 존엄성을 결정하자는 취지다.
사전의료지시서는 시니어 본인이 ‘임종 전 의료 결정’과 ‘임종 후 장례 결정’을 서명이 담긴 문서로 작성하는 절차다. 서명 직후 법적 효력을 발휘하지만, 죽기 전 의식이 명확할 때 수정도 가능하다.
임종 전 의료 결정은 ‘돌이킬 수 없는 불치의 병이나 뇌사로 인해 육체적인 기능이 거의 멈춘 상태, 의학적 회복이 어려울 것이라고 확신이 들 때, 의료 보조기를 사용해 생명을 연장(기도 삽관, 기관지 절개, 인공호흡기 치료, 인공영양법, 심폐소생술 등)하길 원하는지’를 예 또는 아니오(Yes or No)로 선택하면 된다.
임종 후 장례 결정은 ‘장기기증, 매장·화장·시신 기증 등 장례방식, 장례사 또는 시신 기증 기관’을 적으면 된다.
사전의료지시서는 법적 효력을 위해 본인 희망 사항이라는 서명, 증인 2명의 서명까지 들어간다.
소망소사이어티 사무총장인 신혜원 UC어바인 치매 및 뇌신경질환 연구소(UCI MIND) 아시안 아메리칸 디렉터는 “시니어 등 본인이 원하는 방식으로 죽음을 결정하는 자세는 ‘인간의 존엄성’과 연결된다. 사전의료지시서를 작성해 놓지 않으면 치매, 중증질환 등으로 의식을 잃을 경우 본인이 원하지 않는 치료를 죽을 때까지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신 사무총장은 이어 “사전의료지시서를 작성한 이들은 죽음을 두려워하는 대신 ‘내 삶을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마무리할 수 있다’며 만족을 표한다. 특히 자녀들의 죄책감 등 부담을 덜어주는, 자녀에게 가장 좋은 선물을 남겼다고 이야기한다”고 덧붙였다.
한편 웰다잉 캠페인은 사전 교육도 중요하다. 최 시니어 커뮤니티 헬스워커는 “죽음에 대한 생각 등 마음의 준비가 안 된 시니어에게 웰다잉을 강조하면 자칫 거부감, 불안, 트라우마를 느낄 수 있다. 죽음과 관련된 세미나를 할 때는 사전 동의를 구하는 자세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김형재 기자 kim.ian@korea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