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에이펙) 정상회의가 일주일도 남지 않은 가운데, 북·미 정상회담에 대한 기대감은 낮아지는 분위기다. 북한이 재차 미국과는 거리를 두며 러시아와의 밀착을 과시했다. 현 시점에서 미국과 만남을 서두르기보다 여유롭게 상황을 관전하는 모습으로 분석된다.
24일 조선중앙통신은 북한이 러시아 파병 전사자들의 희생을 기리는 추모관을 수도 평양에 건설한다고 보도했다. 전날 열린 착공식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오늘로부터 1년 전 우리 원정부대 전투원들의 마지막 대오가 러시아로 떠나갔다”며 “그 어떤 보수나 바램도 없이 떠나간 길”이라고 연설했다.

김 위원장은 이어 “미국과 서방의 막대한 수혈도 두 나라 인민의 혈통 속에 끓어번지는 정의의 피는 식힐 수 없었다”고 하는 한편 “우리 국가와 러시아 인민의 장한 아들들은 결정적인 승리로써 조로동맹의 강대함을 시위하였으며 정의가 우리 편에 있는 한 패권세력의 야망은 기필코 좌절될 것임을 시대의 벽에 선명히 새겨놓았다”고 강조했다.
미국에는 선을 긋고, 러시아와의 동맹은 다시 한번 추켜세운 것이다.
김 위원장은 착공식에 참가한 파병 참전 병사들의 얼굴을 직접 어루만지며 격려했고, 오열하는 유가족들을 위로했다. 러시아 측에서는 알렉산드르 마체고라 주북한러시아 대사와 대사관 관계자 등이 참석했다.
북한은 우크라이나 파병 1주년을 기점으로 파병군과 유가족에 대한 대대적인 보훈 행사를 잇따라 열고 있다. 김 위원장은 지난 8월 참전군인에 대한 국가표창 수여식을 열고 평양시 대성구역에 참전군인 유족들을 위한 '새별거리'를 조성하겠다고 밝혔다. 새별거리 바로 앞 수목원의 제일 좋은 위치에 전사자들의 유해를 안치하고 '불멸의 전투위훈 기념비'를 세우는 등 대대적인 추모 공간을 꾸미겠다는 구상이다.
임을출 경남대 교수(극동문제연구소)는 김 위원장의 이런 행보에 대해 “향후 대내외 변수에도 북·러 동맹을 깨지 않겠다는 ‘전략적 확약’이 읽히며, 젊은 세대의 희생을 정당화함으로써 향후 지속적인 파병과 희생에 20∼30대를 동원할 도덕적 명분을 확보했다”고 분석했다.
임 교수는 또 김 위원장이 ‘미국과 서방의 수혈로 정의의 피를 식힐 수 없었다’고 한 대목에 대해 “제재로는 북러의 전략적 결합을 끊을 수 없다는 선전”이라 설명했다. 미국이 주도하는 제재·압박 전선에 정명 도전하겠다는 의지를 재확인했다는 의미다.

에이펙 계기에 열릴지 관심을 모으고 있는 북·미 정상의 만남 가능성 관련해서는 김 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의 깜짝 회동 가능성을 더욱 낮추는 신호로 해석된다. 아직 러우 전쟁이 종식되지 않았다는 점, 이를 둘러싼 미국과 러시아 사이의 갈등이 계속되고 있는 와중에 김 위원장이 북러 혈맹을 또 한번 외친 상황이기 때문에 갑자기 트럼프 대통령을 만난다는 것은 상상하기 쉽지 않은 상황이란 분석이다.
임 교수는 “김 위원장 입장에서 현재 트럼프와 만난다는 것은 실익보다 위험이 훨씬 크기 때문에 북미 회동보다 러시아와의 혈맹을 택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봤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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