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서울 시내 한 카페에서 외국인 관광객이 POS단말기 앞에서 결제에 어려움을 겪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그는 여러 차례 카드를 단말기에 터치했지만 기기는 반응하지 않았고, 카페 직원의 도움을 받아 카드를 삽입해 결제를 마쳤다. 주변에도 본인이 평소 사용하던 카드만 가지고 한국을 방문했다가, 한국의 우수한 대중교통 시스템을 이용하려면 현금으로 별도의 교통카드를 구매해야 한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돼 당황해하던 외국인 지인도 적지 않았다.
한국은 디지털 기술과 인프라 측면에서 세계 최고 수준에 올라 있다. 그러나 결제 환경에 있어서는 글로벌 표준과 소비자 기대에 부합하지 못하는 부분이 여전히 존재하며, 이는 외국인 소비자뿐 아니라 해외 시장을 겨냥하는 국내 기업들에도 걸림돌로 작용한다. 글로벌 표준을 따르지 않는다는 사실은 국내 기업과 소비자들이 누릴 수 있는 잠재적 혁신의 가능성마저 제한한다. 글로벌 표준은 기술이 해외 시장에서도 원활히 작동할 수 있다는 근거를 제공함으로써, 기업들이 이에 투자할 수 있도록 하는 중요한 기반이 된다. 또 소비자에게는 언제 어디서나 제품과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다는 신뢰와 편의를 제공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EMV 컨택리스 결제 방식이다. 이는 카드나 스마트폰을 단말기에 가까이 대기만 해도 안전하고 편리하게 결제가 이루어지는 기술로, 빠른 처리 속도와 사용자 편의성 덕분에 세계적으로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또 글로벌 표준 기술인 EMV 규격을 통해 결제에 필요한 데이터를 복합적으로 생성하고 처리하기 때문에 보안성이 뛰어나다는 장점을 지닌다. 국내에서는 전용 독자 시스템을 사용하고 있는 삼성페이 역시 해외에서는 EMV 규격을 채택하고 있다.
비자의 자료에 따르면, 2024년 기준 전 세계 오프라인 카드 결제의 74%가 EMV 기반의 컨택리스 결제로 이루어지고 있다. 싱가포르, 호주와 영국 등 선진 국가는 이미 90% 이상의 보급률을 기록하고 있으며, 해당 방식은 소매점과 대중교통을 포함한 다양한 일상 영역에서 기본적인 결제 수단으로 자리 잡았다. 특히 스마트폰 기반의 컨택리스 결제는 실물 카드 없이도 간편하게 사용할 수 있어 지갑을 챙겨 다니지 않아도 되어, 편의성과 효율성 모두를 갖춘 방식으로 평가받고 있다.
하지만 한국의 상황은 다르다. 국내에 EMV 기반 NFC 단말기를 갖춘 가맹점 비율은 전체의 대형 프랜차이즈를 중심으로 10% 에 불과하며, 컨택리스 카드 결제나 NFC 기반의 애플페이 서비스는 아직 국내 소비자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이는 국내 결제 인프라 내에서 현행 글로벌 표준 도입이 여전히 제한적임을 보여준다. 외국인 방문객이 겪는 불편함은 단순한 일회성 경험이 아니라, 한국 결제 환경의 구조적 한계를 드러내며, 동시에 국내 소비자들이 보다 편리하고 안전한 결제 환경을 누릴 기회를 제약하는 요인이기도 하다.
글로벌 표준을 따르는 결제 시스템은 국경을 초월한 원활한 금융 거래를 가능하게 한다. 외국인 관광객들이 별도의 절차 없이 자국에서 쓰던 방식 그대로 결제할 수 있는 환경은 불편을 최소화하고, 소비 여력을 실제 소비로 전환시킬 수 있다. 이는 관광 및 비즈니스 수요 확대는 물론, 국내 내수 경제에 긍정적인 파급 효과를 가져온다.
교통 분야에서도 글로벌 표준의 중요성은 더욱 부각된다. EMV 기반 컨택리스 카드로 대중교통 요금을 지불할 수 있는 개방형 교통 결제(Open-loop Transit) 시스템은 세계 주요 도시를 중심으로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EMV 기반 컨택리스 카드를 이용한 대중교통 결제가 가능하려면, 대중교통 내 단말기에도 이를 수용할 수 있는 인프라가 갖춰져야 한다. 이러한 시스템이 구축된 도시에서는 카드 발급 국가와 관계없이 글로벌 브랜드의 카드로 곧바로 요금을 결제할 수 있어 외국인 입장에서도 매우 편리하다. 비자는 2024년 한 해 동안 20억건 이상의 컨택리스 승차 결제를 처리했으며, 이는 불과 2년 전 10억건을 돌파한 이후 두 배로 증가한 수치로 , 개방형 교통결제 기술이 이미 보편적인 인프라로 자리 잡았음을 보여준다. 싱가포르, 홍콩, 일본, 태국, 호주 등 여러 국가에서 이미 관련 인프라를 구축했으며, 이들 국가에서는 대중교통 이용 시 EMV 컨택리스 카드나 스마트폰을 단말기에 탭하는 것만으로도 간편하게 요금을 결제할 수 있다.
QR 결제 역시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방식이다. 비자의 '2024 아시아 소비자 결제 동향 조사'에 따르면, QR 결제는 동남아시아 주요 국가에서 가장 선호하는 결제 수단 중 하나로 부상하고 있다. 중국을 시작으로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베트남 등지에서도 보편화되고 있으며, 다양한 디지털 결제 옵션을 수용할 수 있는 인프라를 갖추는 것은 이제 경쟁력이자 필수 요건이 되고 있다. 아시아 주요 국가에서 QR결제가 빠르게 확산됨에 따라 국내에서도 그 필요성과 활용도가 부각되며 점진적인 확산 흐름을 보이고 있다. 특히, 비자는 글로벌 QR 결제 사업자들과 협력해 해외에서도 간편하게 QR코드를 스캔해 결제(Scan to Pay)할 수 있는 서비스를 선보이고 있으며, 이는 EMV 기반의 보안성을 바탕으로 안전하고 신속한 결제 경험을 제공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글로벌 표준이 특정 기업에 유리한 시장 구조를 만들 수 있다는 우려를 제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EMV와 같은 결제 표준은 특정 기업이 통제하는 폐쇄형 기술이 아니라, 금융 산업 전반의 협업을 통해 구축된 개방형 표준이다. 지속적인 보안 업데이트와 투명한 운영 체계 아래 발전해 왔으며, 다양한 참여자들에게 혜택을 제공하고 있다.
비자는 매년 결제 인프라와 보안 기술 고도화를 위해 힘쓰고 있다. 컨택리스 결제의 확산, 개방형 교통 결제 시스템, QR 결제의 상호호환 기술 등은 이와 같은 투자와 혁신의 결과물이다. 이처럼 세계는 빠르게 움직이고 있는 반면, 한국의 결제 시스템은 이러한 글로벌 인프라를 온전히 활용하지 못하는 구조 속에 머물러 있다.
희망적인 점은 국내 금융시장에서 변화의 조짐이 보인다는 것이다. 최근 국내 카드사들은 EMV기반 애플페이 등 컨택리스 결제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 있으며, 지난 3월 제주도에서는 글로벌 결제사 및 간편결제사와의 협력을 통해 컨택리스 카드를 활용한 버스 요금 결제 시스템이 국내 최초로 도입되었다. 이는 기술적 전환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다.
이제는 금융 산업 전반에서 글로벌 표준을 체계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관점의 전환이 필요하다. 기업, 정부, 금융당국이 긴밀히 협력해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기술, 보안 기준, 운영 모델을 국내 환경에 맞게 도입하고 정착시킬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 이를 통해 한국은 글로벌 시장과의 연결성을 높이고, 보다 지속 가능하고 확장 가능한 경제 성장을 실현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패트릭 스토리 비자코리아 사장
〈필자〉미국 샌프란시스코대에서 경제학 학사, 금융경제학 석사 과정을 마치고 1996년 비자(Visa)에 입사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 뉴욕, 싱가포르, 그리고 한국지사에서 다양한 직책을 역임해왔다. 비자의 비즈니스 기획 및 운영과 컨설팅 및 애널리틱스를 차례로 총괄했으며, 소비자 금융, 결제, 정보 서비스 등 여러 분야에 걸쳐 20년 이상의 경력을 쌓았다. 비자코리아 사장으로 취임 후 카드사, 핀테크기업, 유통업계들과 협업하며 한국에 혁신적인 결제 및 데이터 솔루션을 도입하기 위해 힘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