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맛 돋우는 알싸한 ‘겨자장’…어떤 음식과도 ‘찰떡궁합’ 소스

2024-09-30

“임자년(1792년) 가을, 희정당(熙政堂) 앞뜰에서 책문(策問)에 대한 답안을 쓸 때 궐내에서 유생(儒生)들에게 음식을 하사했다. 음식 가운데 큰 그릇에 황개즙(黃芥汁)이 있었는데 이는 삶은 고기를 위해 내놓은 것이었다. 그런데 여러 유생들은 모두 고기를 움켜 그냥 먹을 뿐 개장(芥醬)이 있는 줄을 알지 못했다. 나 홀로 개장에 찍어 반 그릇을 먹었는데 맛이 매우 좋았을뿐더러 가슴이 시원스럽게 뚫리는 듯했다.”

이 글은 1790년(정조 14년) 31세 나이로 생원시에 급제해 성균관 기숙사에서 생활하면서 공부한 이옥(李鈺·1760∼1815년)이 썼다. 성균관 유생 이옥은 학우들과 함께 1792년 음력 7월19일 지금의 2학기 가을에 치는 중간고사 같은 ‘추도기과(秋到記科)’를 봤다. 성균관 유생의 학업에 유독 신경을 썼던 정조가 이 시험의 출제와 채점을 도맡았다. 하지만 정조를 만족시킬 만한 답안을 낸 유생이 없었다. 결국 정조는 유생들에게 이후 두차례 시험을 더 치르게 했다. 세차례 시험이 끝난 후 정조는 내심 유생들에게 미안했던지 쇠고기 편육 한상을 대접했다.

물론 이옥이 밝혔듯이 황개즙이 그 옆에 놓여 있었다. 황개즙은 다른 말로 개장이라고 불렀다. 지금의 말로 옮기면 겨자장이다. 19세기 중반에 쓰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시의전서(是議全書)’ ‘음식방문(飮食方文)’에는 겨자장을 만드는 법이 적혀 있다. 겨자를 물에 담갔다 건져낸 뒤 체 밑에 그릇을 받치고 숟가락으로 문지르며 거른다. 이어 소금·초·꿀을 넣고 저은 뒤 단맛이 나면 종지에 떠놓는다고 했다. 당시 겨자장은 고급 소스였다. 다른 유생들은 편육과 함께 왜 겨자장이 나왔는지 몰랐지만 유독 미식가였던 이옥은 편육을 겨자장에 찍어 먹었다. 이렇게 먹으니 고기맛이 더 좋았다. 결국 이옥은 혼자서 겨자장을 반 그릇이나 비워냈다.

조선시대 왕실이 주관한 잔칫상에는 반드시 겨자장이 올랐다. 심지어 서양인을 접대할 때도 겨자장이 빠지지 않았다. 고종 황제는 대한제국을 일본의 야심에서 구하기 위해 미국 제26대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딸 앨리스 루스벨트(Alice Lee Roosevelt·1884∼1980년)가 1905년 9월19일 서울을 방문하자 그와 경운궁(지금의 덕수궁) 중명전 2층 홀에서 점심을 함께 먹었다.

당시의 메뉴판을 지금까지 뉴욕 공공도서관이 소장하고 있어 그들이 무엇을 먹었는지 알 수 있다. 이 메뉴판에도 겨자장이 나온다. 여기에는 말린 전복을 얇게 썰어 기름에 볶아낸 전복초와 고기·채소를 꼬치에 꽂아 구워낸 화양적을 겨자장에 찍어 먹어야 한다고 적혀 있다. 이옥과 달리 이 메뉴판에 나오는 편육은 조선간장에 식초를 섞은 초장(醋醬)에 찍어 먹으라고 표시돼 있다.

20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격식 있는 한식 상차림에는 초장과 겨자장이 반드시 올랐다. 옛사람들도 소스의 중요성을 잘 알았다. 불행하게도 20세기 중반 이후 우리 밥상에선 초장과 겨자장이 사라졌다. 1960년대 이후 초장의 자리는 양조간장에 빼앗겼고 점점 사람들에게 잊혔다. 심지어 21세기에 들어와서 전세계적으로 핫소스 붐이 일어나자 한국의 젊은이들은 태국이 고향인 미국산 핫소스 ‘스리라차’에 열광하고 있다.

이옥은 편육을 겨자장에 찍어 먹고서 ‘흉격위통(胸膈爲洞)’, 곧 막힌 가슴이 뚫리듯 시원한 느낌이라고 감탄했다. 여름이 가을을 삼켜버린 요즘, 우리도 편육이든지 수육이든지 가리지 말고 옛 겨자장을 되살려 이옥처럼 가슴이 팍 뚫리는 시원함을 느껴보자.

주영하 한국학중앙연구원 민속학 교수·음식 인문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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