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본질, 다른 결과 - 나의 선택과 태도는?

2024-10-02

어느 대학교수가 흥미로운 실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학생들에게 사과를 한 상자씩 나누어 주고, 그들이 어떻게 사과를 먹는가를 관찰했다고 합니다. 어떤 학생들은 ‘큰 사과’만을 골라서 한 상자를 다 먹고 나서, ‘나는 큰 사과 한 상자를 먹었다’고 말했습니다. 한편, 어떤 학생들은 먼저 ‘작은 사과’만 골라 먹고 큰 사과는 남겨 두었습니다. 그러고는 ‘작은 사과 한 상자를 먹었다’고 말했습니다. 또 어떤 학생들은 상한 사과를 아예 골라 내다버리고 ‘맛있는 사과’만을 먹었는데, 한 상자를 다 먹고 난 후 ‘나는 맛있는 사과 한 상자를 먹었다’ 말했다고 합니다. 또 다른 어떤 학생들은 손실을 줄이기 위해 주로 ‘상한 사과’를 먼저 먹었는데, 결과적으로 ‘상한 사과’만 먹은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완샤’라는 저자가 쓴 <장자>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완샤의 위 이야기를 읽고 근래에 들어 가장 많은 생각을 하게 된 것 같습니다. 이 이야기는 ‘인생관’, ‘삶의 태도’와 직결되는 이야기였습니다.

학생들은 모두 똑같이 사과를 먹었습니다. 그러나 사과를 먹는 방법은 각기 달랐습니다. 주어진 사과 한 상자는 모두 같았지만, 먹는 방법이 서로 달랐습니다. 주로 크고 맛있는 사과만 골라 먹은 학생들은 결국 크고 맛있는 사과 한 상자를 먹은 셈인데, 당연히 기분도 좋고 즐거웠을 것입니다. 이에 비해 주로 작거나 썩은 사과를 먹은 학생들은 그다지 즐겁지 않았을 것이며 되려 기분이 나빴을 것입니다. 모두 같은 사과 한 상자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누구는 크고 맛있는 사과 한 상자를 먹고 다른 누구는 작고 상한 사과 한 상자를 먹었습니다. 기분이 좋고 나쁜 것은 사실 많은 부분, 자기의 선택에 달려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그럴 수밖에 없었을 나름의 사정과 형편이 있었겠지만 말이죠.

우리의 인생은 다만 한 상자의 사과만 주어지고 마는 그런 단순한 것이 아닙니다. 되려 꼬리에 꼬리를 물듯 인연이 운명으로 연결되고 또한 운명적인 인연이 난데없이 튀어나오기도 하는 놀라운, 대혼돈의 파티에 가까운 것으로 보입니다. 희망과 의지가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도 했습니다.

다만 사과가 주어지든, 귤이 주어지든 - 무엇이 주어지든 - 기존에 익숙하고 좋아했던 것에 집착, 의존, 의지하는 내가 있을 뿐입니다. 또는 평소에 좋아하지 않거나 심지어 싫어하기까지 했던 그런 것이 주어지면 인정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고, 그것으로 버틸 수 없고, 생존할 수 없는 나약한 내 자신이 있을 뿐입니다. 어떤 나는 큰 사과, 맛있는 사과만을 골라 먼저 먹을 수 있는 배포가 있을 수 있고 다른 나는 작은 사과, 상한 사과를 먼저 먹어야 하는 형편에 있을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은 내 탓이며, 내 형편에서 비롯되는 의지적인 또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의 결과입니다. 어차피 한 상자의 사과라면 어떤 방식으로 그 사과를 먹어야 할지 생각해 보게 되었고 더 나아가 실로 어떻게 먹고 있는지,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완샤’가 말한 위 이야기의 바탕이 되는 <장자>의 이야기는 제물론에 나오는 ‘조삼모사’ 이야기였습니다. 원숭이한테 먹이를 줄 때, 아침에 세 개 저녁에 네 개를 주는 방법과 아침에 네 개 저녁에 세 개를 주는 방법이 있다고 합니다. 본질적으로 하루에 주는 먹이의 양에는 변함이 없지만, 원숭이들은 어느 쪽이냐에 따라 희비가 엇갈렸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어떤 일을 뒤집어 보면 본질은 같은데도 다른 느낌이 들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어렸을 때 부모님으로부터 ‘상태가 안 좋은 귤이나 사과를 먼저 먹으라’고 교육받았습니다. 그래야 결국 다 먹을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일견 타당한 선택이었습니다. 하지만 막 결혼하고 나서 제 아내는 ‘가장 싱싱한 것을 먼저 먹으라’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더 이상 못 먹을 것만 남으면 ‘나머지는 버리라’고 했습니다. 당황스러웠으나 이 또한 타당한 선택이라는 것을 곧 알 수 있었습니다. 어렸을 때에는 한 가족, 여섯 식구였고 막 결혼해서는 한 가족, 두 식구였습니다. 어렸을 때나 막 결혼했을 때나 모두 똑같은 사과 한 상자, 귤 한 상자였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면 정반대의 방법으로 그것들을 먹었습니다. 정반대의 선택이었지만, 하지만 본질적으로 같았습니다. 그때나 저때나 모두, 저는 행복했습니다.

똑같은 사과 한 상자, 귤 한 상자 - 다른 느낌, 같은 행복. 이것이 바로 장자가 말한 ‘천균’(하늘의 고름)이고 ‘양행’(두 길을 모두 걸음)인가 싶습니다. 하지만 실로 모를 일입니다. 참고로 <장자>의 제물론에 나오는 ‘조삼모사’ 원문을 옮겨 적어 봅니다.

“사물이 본래 하나임을 알지 못하고 죽도록 한쪽에만 집착하는 것을 일러 ‘조삼모사’라고 한다. 무슨 뜻인가? 원숭이 치는 사람이 원숭이들에게 도토리를 주면서 ‘아침에 셋, 저녁에 넷을 주겠다’고 했다. 원숭이들이 모두 성을 냈다. 그러자 그 사람은 ‘그러면 아침에 넷, 저녁에 셋을 주겠다’고 했다. 원숭이들은 모두 기뻐했다. 있는 그대로 인정해야 한다. 그러므로 성인은 옳고 그름의 양극을 조화시킨다. 그리고 모든 것을 고르게 하는 ‘천균’(하늘의 고름)에 머문다. 이를 일러 ‘양행’(두 길을 모두 걸음)이라고 한다.” (<장자>, 제물론)

지극히 잘 알려진 ‘조삼모사’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장자>에 나오는 모든 이야기는 긴 호흡으로, 전체적인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들입니다. ‘단장취의’를 경계해야 합니다. 장자는 ‘천균’과 ‘양행’을 말하기 위해 ‘조삼모사’를 이야기했을 따름입니다. 즉, ‘전혀 달라 보이는 양극단의 모습이 본질적으로는 같은 것일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바보같은 원숭이를 비웃고 있는 것이 아니라, 원숭이를 만족시킬 수 있었던 원숭이 치는 사람의 지혜를 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원숭이와 원숭이 치는 사람은, 결국 한 사람입니다. ‘장자’는 사물이 본래 하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본질은 같으나 선택, 태도에 따라 다른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장자>의 다른 이야기 하나를 더 소개하면서 이번 제 이야기를 마무리하겠습니다. 관심이 있으시면 원문을 꼭 읽어 보시길 추천합니다. 생각보다 쉽게 잘 읽힙니다. 특히 <장자>라는 고전은 모두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고 이미 여기저기서 들어본 이야기들도 많이 나옵니다.

“손 트는 것을 막는 약은 한 가지인데, 한 쪽은 그것으로 영주가 되고, 다른 쪽은 무명 빠는 일밖에 못했으니, 똑같은 것을 가지고 쓰기에 따라 이렇게 달라지는게 아닌가?” (<장자>, 소요유)

※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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