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 다쿠미, 조선 산림녹화에 매진
형 노리타카는 조선도예사 체계화
우리 민족의 문화·예술 알리고 보존
일제강점기, 우리에겐 여전한 아픔
침략의 관점으로만 역사 바라보면
진정한 교류도 더 나은 미래도 없어
힘들 때 친구가 되었던 일본인 기억
한·일 수교 60주년… 다시 시작할 때
“한국의 산과 민예를 사랑하고 한국인의 마음속에 살다 간 일본인, 여기 한국의 흙이 되다.”
서울 중랑구 망우역사문화공원 내 아사카와 다쿠미(淺川巧·1891∼1931) 묘소 비석에 새겨진 글귀다. 일본 야마나시현 호쿠토시 아사카와 노리타카·다쿠미 형제 자료관 앞 정원의 비석에도 같은 글귀의 비석이 서 있다. 자료관 앞 책상에 놓인 방명록에는 서울에서 왔다는 한 고등학생이 한자 한자 정성스럽게 쓴 글을 읽으면 슬쩍 미소를 짓게 된다. “다쿠미씨에 대해 더 공부하고, 많은 사람이 일본(일본인)과 좋은 관계가 되고, 더 활발하게 교류를 했으면 좋겠습니다.”

다쿠미는 한국과 일본이 함께 기억하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특별하다. 1914년 조선으로 건너와 조선임업시험소에서 근무하며 산림녹화 사업에 매진했다. 당대 조선인들이 일상에서 사용하는 공예품을 비롯한 조선문화를 깊이 애정해 지금도 명저로 평가받는 ‘조선의 소반’, ‘조선도자명고(朝鮮陶磁名考)’를 남기기도 했다. 40살 젊은 나이에 갑작스레 세상을 떠난 뒤 그의 희망에 따라 조선에 묻혔다. 비문은 다쿠미의 생애에서 유래하고, 고등학생의 방명록은 그의 생애에 대한 감응이다.
다쿠미를 조선으로 이끈 건 7살 터울의 형 노리타카(伯敎·1884∼1964)였다. 도예가, 조각가, 화가로 다재다능했던 그는 가마터 700여 곳을 답사해 조선도예사를 체계화했다. 지금도 노리타카를 ‘조선 도예의 신’으로 기리는 이들이 있을 정도로 그의 성취는 높게 평가된다. 이동식(72) ‘아사카와 노리타카·다쿠미 형제 현창회’ 회장은 22일로 한국과 일본이 수교 60주년을 맞는 것을 상기시키며 “60년에는 세상이 한 바퀴 돌아서 다시 시작한다는 뜻이 있다. 한·일 관계도 이제 새롭게 다시 시작할 때”라며 “두 나라 관계가 새로워지는데 아사카와 형제가 징검다리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지난달 27일 서울 종로구 청진공원에서 이 회장을 만났다.
―현창회는 어떤 단체인가.
“아사카와 형제는 일제강점기에 우리 민족과 문화를 사랑하고 예술을 지켜준 사람들이다. 조선총독부 산림과에서 일했던 다쿠미는 조선인들과 같은 옷을 입고 우리말을 쓰며 조선인과 자신을 동일시했고, 우리 문화의 아름다움을 찾아 정리하고 알렸다. 죽어서도 조선 땅에 묻히기를 희망했고, 장례도 조선의 방식대로 치러달라고 유언했다. 노리타카는 조선의 도자기의 아름다움에 빠졌다. 형제는 야나기 무네요시와 함께 1924년 (경복궁에) ‘조선민족미술관’을 개관해 조선 문화를 보존하고 알렸다. 현창회는 아사카와 형제를 친구로서 기억하기 위해 개인과 단체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모임이다. (다쿠미의 기일에 맞춰) 매년 4월2일 망우역사문화공원 다쿠미 묘역에서 형제를 기리는 행사를 연다. 올해는 양국 수교 60주년이라 예년보다 많은 분이 참여했다. 주한일본대사관 공사가 참석해 한국, 일본이 함께 형제를 기리는 자리가 됐다. 서울 중랑구청, 문화유산국민신탁, 한국외교협회, 일본군강제징용피해자지원재단 등의 관계자들도 함께했다.”

―현창회 활동에 참여하게 된 계기는.
“기자로 30년 넘게 일하며 역사, 문화 분야 취재를 주로 담당했다. 1990년대 초반 중국 특파원 생활을 하면서 (아시아에 대한) 침략자로서의 일본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됐다. 한국인이라면 일반적인 인식이지만 다쿠미를 알게 되면서 한국과 일본이 굉장히 가깝고 잘 지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해졌다. 한국을 사랑한 일본인들에 대해 우리가 너무 모르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돼 관련된 책도 썼다. 그러던 중 현창회 활동을 앞서 하고 계신 분들을 만나 본격적으로 활동하게 됐다.”
―아사카와 형제가 조선을 그토록 좋아한 이유가 무엇일까.
“노리타카는 하얗고 장식도 없는 백자에서 우리 민족의 깨끗한 마음을 봤다. 그것을 자신이 꿈꾸던 행복한 세상의 상징이라고 여겼다. 이런 생각을 다쿠미가 이어받았다. 조선의 예술만이 아니라 조선 사람과 땅을 사랑했다.”

―아사카와 형제의 활동 중 특히 인상적인 것을 꼽는다면.
“다쿠미는 조선총독부 산림청에 근무하면서 당시 헐벗은 조선의 산을 푸르게 하기 위해 신품종을 보급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겼고, 실천에 옮겼다. 우리 스스로도 귀한 줄 몰랐던 밥상이나 밥그릇 등 민예품에 애정을 두어 예술품으로서의 가치를 부여했다. 노리타카는 전국의 가마터를 답사했다. 그곳에서 발견한 도자기 조각을 조사해 도자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했다. 일제강점기 우리 도자기는 뿌리를 잃을 위기에 처했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큰 성과다. 자신들이 좋아하는 조선인이 이렇게 멋지게 사는 사람들이란 것을 생활문화 속에서 확인하고 세상에 알린 게 아사카와 형제다.”
일본과의 과거사는 우리에게 여전한 아픔이고, 제대로 된 반성, 사과에 소극적인 일본 정부의 태도에 분노한다. 이런 사실 때문에 일제강점기라는 엄혹한 시절에도 진정한 친구가 된 일본인이 있었음에 제대로 주목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이 회장이 아사카와 형제를 비롯해 “한국과 일본 사이에 새로운 마음의 징검다리를 놓아줄 사람들”을 소개한 ‘친구가 된 일본인’(2017년)이란 책을 썼을 때 한 언론이 “용감한 작업”이라고 평가했던 것은 한국 사회의 이런 정서를 감안한 것이다. 이 회장은 이런 점을 안타까워했다.
“오늘날 우리가 일본을 이웃집 드나들 듯하고, 젊은이들은 스스럼없이 친구가 되는 세상인데 일본인을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이라고만 기억하면 어떻게 미래를 함께하겠는가. 이제부터라도 친구가 되었던 일본인을 기억하고 우리도 일본인들에게 친구가 되어주어야 미래를 기약할 수 있다.”

―아사카와 형제 외에 누가 있나.
“(아사카와 형제와 함께 활동했던) 야나기 무네요시는 일제강점기에 철거 위기에 놓였던 광화문의 보호를 호소했다. 요네다 미요지는 석굴암 등 한국의 고건축이나 미술품들을 실측 조사해 아름다움의 비밀을 밝혔다. 다나베 히사오는 우리 궁중음악을 연구하고, 악사들을 지원해 해방 이후 궁중음악이 살아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오구라 신페이는 조선어 연구가로서 향가를 처음으로 완역했다. 해방 이후 우리말의 실태와 체계를 조사하고 기록하기도 했다. 미즈사키 린타로라는 사람은 대구 수성못을 만들어 농사 기반을 확충했고, 세상을 뜬 뒤 수성못 근처에 묻혔다. 소다 가이치는 고아들을 돌봐 ‘하늘의 할아버지’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였다.”
―우리가 강점기에 입은 피해에만 너무 갇혀 있는 것인가.
“우리가 괴롭힘을 당하고, 피해를 입은 것은 사실이다. 다만 침략의 관점으로만 보면 역사를 제대로 보지 못할 수 있고 진정한 교류를 할 수 없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원망과 증오만으로는 안 된다.”
―수교 60주년을 맞은 지금 아사카와 형제는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두 나라 관계가 새로워지려면 서로를 잘 알고, 그 장점을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 일제강점기 조선을 사랑했던 아사카와 형제가 징검다리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고대에 우리 선조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문명을 전했듯, 근대 서양문명을 먼저 받아들인 일본으로부터 우리가 영향을 받은 것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과거를 잊자는 것은 아니다. 과거 속에서 미래를 위한 양분을 찾기 위해서는 역사를 크게 봐야 한다. 가장 가까운 이웃으로서, 친구로서 더 좋은 미래를 위해 머리를 맞댈 수 있다는 점에서 현창회 활동도 의미를 가진다고 본다.”

―양국 민간교류가 좀 더 발전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올해 4월 다쿠미 추도행사에 주한일본대사관 공사가 한 추도사가 인상적이었다. 양국 정부 간에야 의견 차이가 클 수 있지만 민간은 그럴 이유가 없다, 일본인들은 한국 드라마를 즐기고, 한국인들은 일본 음식을 좋아한다, 재미있는 것은 재미있고, 맛있는 것은 맛이 있는데, 그것은 누구도 막을 수 없다, 상대방의 문화를 인정하면서 서로 발전할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미 두 나라 젊은이들은 스스럼없이 가까워졌다. 서로 상대의 노래를 원어로 부른다. 결혼도 많이 한다고 하니 친구를 넘어 가족으로 가고 있다. 서로를, 양국 관계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시도들이 있었지만 이제는 정리하고, 친구가 되어 밝은 미래를 기대했으면 한다. 두 나라 사람들이 진정한 친구가 되는 것, 그것이 우리 현창회가 진심으로 바라는 것이다.”
‘아사카와 형제 현창회’ 이동식 회장은…●1953년 경북 문경 ●서울대 영어교육과 ●가천대 방송학 석사 ●KBS 기자 ●1984년 백남준 작 ‘굿모닝 미스터오웰’ 한국 중계 ●1993년 북경 특파원 ●KBS보도본부 문화부 부장 ●2017 은관문화훈장
대담=강구열 국제부장, 정리=임성균 기자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