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주에서 도박으로…프리미어리그 유니폼 스폰서 변화, 문제 없나

2025-04-20

한때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 구단들의 유니폼 가슴팍에는 지역 밀착형 브랜드, 친숙한 생활 제품 업체들이 자리했다. 그러나 30여 년이 흐른 지금, 그 자리는 더 이상 맥주나 피자, 자동차가 아닌 ‘도박’이 대체하고 있다. 프리미어리그 유니폼 스폰서 변화는 단순한 브랜드 교체를 넘어, 축구 산업 구조와 팬 문화, 글로벌 자본 흐름까지 들여다볼 수 있는 지표로 작용한다고 BBC가 20일 보도했다.

■ 11개 구단이 도박업체 스폰서…총액 1억 달러 넘겨

EPL은 2026-27시즌부터 도박업체의 유니폼 전면 광고를 자제하겠다는 ‘자율 규제’를 예고했다. 그러나 2024-25시즌 기준 리그 20개 구단 중 절반이 넘는 11개 팀이 여전히 도박 업체를 가슴 스폰서로 두고 있다. 지난해보다 3개 팀이 증가한 수치다. 시장조사기관 글로벌데이터에 따르면, 프리미어리그 구단과 도박 기업 간 유니폼 스폰서 계약의 총 가치는 약 1억 3540만 달러에 달한다. 나머지 9개 구단은 항공, 엔터테인먼트, 금융, 테크 산업군 기업들과 스폰서 계약을 맺고 있다. 하지만 이들 또한 영국을 기반으로 한 경우는 드물고, 팬들과의 직접적 소비관계보다는 글로벌 브랜드 노출에 목적을 둔 경우가 많다.

■ 지역 기업에서 글로벌 자본으로…스폰서 지리적 거리도 2배 이상 늘어

1992-93시즌 프리미어리그 출범 당시 22개 구단 유니폼 스폰서 중 절반 이상은 영국에 본사를 둔 회사들이었다. 다수는 팬들이 직접 구매할 수 있는 물리적 제품을 판매했으며, 클럽 본사와 스폰서 본사의 거리도 평균 3000㎞에 불과했다. 당시 셰필드 유나이티드, 입스위치타운은 스폰서 본사가 구단에서 1마일도 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다.

하지만 2024-25시즌 현재는 평균 거리 7000㎞ 이상으로 두배 이상 늘었다. 스폰서 국적도 다양해졌고, 클럽과의 지역적 유대는 사실상 사라졌다. 현재 영국 내 본사를 둔 유일한 유니폼 스폰서는 리버풀의 스탠다드차타드지만, 이마저도 일반 영국 고객에게 계좌 개설을 허용하지 않는다. 이처럼 EPL은 명실상부한 글로벌 리그로 성장했지만, 동시에 현지 커뮤니티와의 연대는 약해지고 있다.

■ 사라진 산업군…그 자리에 도박이 들어섰다

출범 초기 유니폼 스폰서 시장은 컴퓨터, 복사기, 전자, 의약품, 건설 등 다양한 분야의 실물 기반 기업이 주도했다. 하지만 현재 EPL 유니폼 전면에 자리 잡은 브랜드 중 팬이 직접 제품을 구매할 수 있는 업체는 거의 없다. 기술, 건설, 의류 산업군은 유니폼 광고 시장에서 사실상 퇴출됐다.

1992-93시즌 스폰서였던 피슨스(Fisons), ICI, 미타 복사기(Mita), 툴립컴퓨터 등은 모두 지금은 시장에서 사라졌다. 대신 최근 EPL 유니폼 전면을 장악하고 있는 것은 도박 업체들이다. 유럽 주요 리그 중에서도 벨기에, 그리스, 헝가리, 네덜란드, 폴란드, 포르투갈, 러시아 등에서도 도박업체가 가장 흔한 스폰서 유형으로 나타났다.

UEFA 최근 재무 보고서에 따르면, 유럽 축구 1부리그 팀들의 유니폼 스폰서 산업 비율은 도박(15%), 소매 유통(12%), 항공·자동차·금융·식음료(각 10%) 순이다. 잉글랜드 챔피언십(2부)에서는 번리, 미들즈브러, 퀸스파크레인저스, 스토크시티, 선덜랜드, 왓포드 등 6개 팀이 도박 업체와 계약을 맺었다. 반면 3부리그격인 리그1, 4부리그격인 리그2에서는 도박업체 스폰서가 없으며, 에너지, 식음료, 자동차 기업이 주요 후원사로 자리하고 있다.

■ 도박광고가 일상화된 EPL…청소년에겐 공백 유니폼

2024-25시즌 EPL 개막 주말 동안, 도박 광고는 총 2만 9000 회 이상 노출됐다. 이는 전년도 대비 3배에 달하는 수치다. 비영리 중독 방지단체 ‘갬반(Gamban)’ 공동 설립자 맷 자브-커즌은 “도박 광고는 축구와 거의 불가분의 관계가 됐으며, 도박업계는 특히 문제 발생 가능성이 높은 젊은 남성을 집중적으로 겨냥한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18세 미만 선수나 팬은 도박 로고가 들어간 유니폼을 착용할 수 없다. 이 때문에 최근 레스터시티 소속 15세 윙어 제레미 몽가는 도박 로고가 없는 공백 유니폼을 입고 경기에 나서 화제를 모았다.

■ 왜 EPL 중하위권 구단만 노리나…“가성비 높은 마케팅”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맨시티, 리버풀, 첼시, 아스널, 토트넘 등 EPL 상위 6개 구단은 모두 도박업체와 유니폼 메인 스폰서 계약을 맺지 않고 있다. 이는 구단 브랜드 이미지와 글로벌 팬 기반을 고려한 전략적 선택으로 풀이된다.

반면 도박 기업들은 리그 중하위권 구단과의 계약을 선호한다. 강등 위기와 재정적 불안정에 놓인 구단들은 스폰서 수입이 절실하며, 비용 대비 효과도 뛰어나다. 상위권 팀과의 경기 중계 시에도 도박 로고가 함께 노출되기 때문이다.

일부 도박업체는 큐라소, 몰타 등 조세 회피처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실제로는 영국에서 도박 서비스를 제공하지 않는다. 이들은 EPL 유니폼 스폰서를 통해 동아시아, 특히 중국 등 비공식 시장을 겨냥하고 있다. 중국 내 도박은 불법이지만 VPN 등을 활용하면 우회가 가능하고, EPL 중계 자체가 거대한 광고판이 되기 때문이다. 브리스톨대학 라파엘로 로시 교수는 “이들은 영국에서 광고를 하고, 중국에서 인지도를 얻는다. 중국 정부가 개입할 수 없는 구조다. 단지 유니폼 광고만으로도 도박의 인식 전환을 유도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 PR 효과에 그칠 수도 있는 ‘도박 광고 금지’

프리미어리그는 2026-27시즌부터 도박업체 유니폼 전면 광고를 자율적으로 중단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이 조치가 실질적인 변화보다는 ‘대외 이미지 개선’을 위한 제스처에 그칠 가능성도 제기한다. 스포츠 경영학자 조 피긴 박사는 “이 조치는 상징적 의미는 있지만, 광고가 유니폼에서 경기장 전광판, 훈련복, 소셜미디어로 옮겨갈 뿐 실질적 억제 효과는 적을 것”이라며 “프리미어리그는 경제적 자립뿐 아니라 지역사회와의 연계도 고민해야 할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BBC는 “프리미어리그 유니폼 스폰서의 변화는 단순한 디자인의 변화가 아니다. 글로벌 자본의 흐름, 소비자의 위치 변화, 그리고 스포츠와 도박이 맺는 위험한 동거의 현주소”라며 “EPL의 상징은 이제 ‘축구공’보다 ‘도박 로고’에 가까워지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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