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3년 8월17일에서 8월20일 사이에 조선 역사의 한 자락을 바꿨을지 모르는 사건이 조정에서 일어났다. 왕의 신임을 등에 업은 이조 판서 이량이 촉망받는 젊은 관료 6명을 유배 보내려다 되레 자신이 유배를 간 사건이다. 그는 이들을 귀양 보낸 후 사림의 광범한 지지를 받는 주요 인물 40여명도 제거하려는 ‘살생부’를 작성했다. 여기에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이 첫머리에 적혀 있었다.
당시는 무오사화(1498년)로 시작된 사화가 이어지던 시기였다. 양심적 관리와 선비들이 죽임을 당했고 귀양을 갔다. 1545년 12세의 명종이 즉위한 후에도 사화는 이어졌고 모친 문정왕후가 권력을 전횡했다. 시간이 흘렀고 명종도 성인이 되자 자기 힘을 갖고자 했다. 그 과정에서 등용한 사람이 이량이라는 인물이다. 구악이 신악으로 바뀌었을 뿐 달라진 것은 없었다. 이량에 대해 사림의 반발과 저항이 거셌다. 이량도 그것을 잘 알아서 이들을 제압해야겠다 작정하고 일으킨 것이 1563년 사건이다.
<명종실록>에 따르면 1563년 이량의 아들 이정빈이 과거에 수석으로 급제했다. 이량이 시험문제를 미리 빼돌려 만든 결과였다. 이후 불과 4개월 만에 이정빈이 이조 좌랑 자리에 앉았다. 법과 관례상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조 정랑·좌랑 자리는 최고의 신진엘리트가 가는 자리였다. 그런데 이정빈이 임명된 직후 이량이 이조 판서에 임명되었다. 부자가 같은 관서에 있을 수 없는 상피제 때문에 이정빈이 다른 자리로 옮겼다. 그러자 이량은 자기 말을 잘 듣는 인물들을 차례로 그 자리에 앉히려 했다. 이때 문제가 발생했다. 신임 이조 좌랑에 대한 추천권은 현직 이조 정랑과 좌랑이 가졌다. 그런데 현직 이조 정랑 박소립과 이조 좌랑 윤두수가 이량의 뜻을 따르지 않았다. 이것이 이량의 사림에 대한 평소 감정에 불을 붙였다.
이량은 박소립, 윤두수에 기대승, 이문형, 허엽, 윤근수를 포괄해 삭탈관직하고 한양 밖으로 내쫓기를 명종에게 청했다. 명종이 바로 허락했다. 이량은 전에 기대승의 명망을 듣고 사람을 보내 한 번 만날 것을 청했는데, 기대승이 거절한 적이 있었다. 이량의 의도는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그 기회에 당대의 명사(名士)를 다 죽이고자 하여 이미 그 이름을 몰래 기록했는데 모두 40여인이었다.” 그 첫머리에 재야에 물러나 있는 이황과 조식이 있었다.
이량의 시도는 필연과 우연의 결과로 좌절되었다. 공교롭게도 18일에 이량의 집에 제사가 있어서 그는 후속 조치를 곧바로 추진할 수 없었다. 그런데 바로 그날 홍문관 부제학 기대항이 움직였다. 그는 기대승의 사촌형이자, 기묘사화로 죽은 기준의 아들이었다. 17일 저녁, 혹은 18일에 기대항은 인순왕후의 아버지 심강의 집에 가서 이량의 축출을 논의했다. 심강은 사림을 지지하는 인물이었다. 이 과정에 심의겸이 큰 역할을 했다. 그는 심강의 아들이자 인순왕후의 동생으로, 바로 전해에 과거에 급제하여 조정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중이었다. 그는 이량이 탄핵한 사람들과 가까웠고, 이황의 제자였다.
19일에 기대항이 이량을 이조 판서에서 물러나게 하라는 홍문관 명의의 상소를 올렸다. 명종이 상소를 받아들였다. 장인 심강의 힘이 작용한 결과였다. 곧바로 사림과 가까운 권철이 이조 판서에, 기대항이 사헌부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20일에 이량이 유배형에 처해졌다. 9월15일엔 쫓겨난 6명이 모두 복직되었다. 사건 발생 4년 뒤 선조가 즉위하자 마침내 사화의 시대가 끝나고 사림 정권이 성립한다. 명종은 사건 후에도 이량을 늘 그리워해 그를 조정에 불러들이려 했다. 하지만 이량의 귀양은 풀리지 않았고 1582년 평안도 선천에서 사망했다. 사화를 겪으면서도 힘을 축적하고 세력을 넓혔던 사림이 제도적 방식으로 사화의 발생을 억제했던 것이다. 선조 즉위 후 사림 정치의 성립은 우연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