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윤석열과의 결별

2024-12-25

최승호의 ‘대설주의보’는 1980년대 군사독재의 폭압을 대설(大雪)에 빗댄 시다. 시는 세상을 얼어붙게 만든 눈보라 군단을 백색의 계엄령이라고 했다. 2024년 12월3일, 백색의 계엄령은 현실의 언어가 됐다. 장갑차와 헬기를 앞세운 계엄군이 국회에 투입됐고 선관위 침탈을 시도했다. 접경지 강원도 양구에도 군인들이 드나들었다.

그날 밤 계엄이 성공했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두건, 야구방망이로 무장한 계엄군이 선관위를 침탈하고 부정선거가 확인됐다는 발표가 나온다. 부정선거 음모론을 지피던 극우세력들이 광장을 장악한다. ‘수거(체포) 대상’들은 언제 체포·사살될지 모를 공포에 갇힌다. 북의 공격을 유도해 ‘전시·사변 또는 그에 준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대통령 윤석열의 탄핵소추안이 부결됐다면 또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내란 사태를 일으킨 대통령이 복귀한 뒤 반대파를 색출한다. 탄핵 집회에서 응원봉을 들고 선결제에 동참했던 시민·기업은 직장을 잃거나 세무조사에 시달린다. 수많은 야권 인사들이 국가보안법 위반 등 조작된 혐의로 정치생명을 잃는다.

다행히 끔찍한 사태는 막았지만 우리는 여전히 벼랑 끝에 서 있다. 지금 집권세력의 모습을 보라. 대통령 윤석열은 친위 쿠데타를 시도하고도 “2시간짜리 내란이 어딨느냐”며 수사에 불응하고 있다. 내란 방조의 무거운 책임을 져야 할 정부는 거부권을 행사하며 계엄 전으로 돌아갈 기세다. 계엄에 반대한다던 국민의힘은 불법 계엄을 선포한 대통령을 비호하더니 아예 내란 동조 세력이 당을 장악했다. 기가 막힐 노릇이다. 도대체 자신들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모르는 것 같다. “아파트 엘리베이터 1층 문이 열리면 잡혀갈까 싶어 다시 10층으로 올라갔다” “80년 5월17일 계엄군에 끌려간 동생이 생각나 그 새벽에 전화로 생사를 물었다”. 계엄, 내란이란 바로 이런 거다.

항간엔 대통령이 영화 <서울의 봄>을 두 번 보며 무릎을 쳤다는 말도 들린다. 전두환식 독재를 꿈꿨던 걸까. 독재로 가려는데, 민주화 이후 만개한 민주주의를 못 견디겠다는 신호를 계엄으로 드러내려 한 걸까. 도스토옙스키는 ‘독재는 습관이다. 그것은 마침내 질병으로 변한다’고 했다. 습관이 질병을 만든다는 평범한 진리를 담은 말이다. 전두환·노태우도 이러진 않았다는 한탄, 대통령 한 사람만 물러나면 새 세상이 올 줄 알았다던 착각. 이렇게 대통령 개인의 ‘비인격적 지배’(습관)를 방치한 사이 우리는 윤석열 정부라는 심각한 질병과 맞닥뜨렸다.

공고한 줄 알았던 민주주의는 지난 3년간 급속히 퇴행했다. 비선출 권력의 정치권력화, 비판 언론 공격, 표현의 자유 후퇴 등을 들 수 있다. 2024년 스웨덴 민주주의다양성연구소가 조사·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올해 한국의 자유민주주의 지수는 지난해보다 20계단 추락한 47위였다. 민주주의 국가 중 지난해보다 민주주의 지수가 후퇴한 나라는 한국이 유일했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독재로 가게 된다는 전문가들의 경고에도 국민의힘은 가짜뉴스 대응단을 꾸리며 계엄을 두둔하고 있다. 더 심각한 건 사회적으로 합의된 보편적 가치가 윤석열 정부에서 무너졌다는 점이다. 실제 자유, 평등, 다원주의, 선거를 부정한 사례가 부지기수다. 특히 극우인사들이 권력과 보수의 주류로 등장한 것은 이전 정부에서 볼 수 없었던 현상이다. 이들은 냉전 이데올로기를 국가 정책으로 구현하면서 정치적 반대세력에 대한 공격을 일상화했다. 야당을 국헌문란 세력으로 규정하고 선관위 기능을 부정한 대통령의 계엄 선포(3일), 대국민 담화(12일)는 그 정점이다.

많은 이들이 12월3일 이전과 이후는 달라야 한다고 말한다. 벌써 달라졌고 지금도 달라지고 있다. 계엄의 밤 당시 시민들은 탱크를 막아서며 국회 담을 넘는 의원들을 도왔고, 군에 자식을 보낸 부모는 “시민을 향해 총부리를 겨누지 말라”고 당부했다. 세월호·이태원 참사의 교훈을 잊지 않은 젊은이들은 부당한 공권력에 따르지 않겠다며 차도 위에 드러누웠다. 광장과 남태령 고개에선 여성, 농민, 성소수자, 노동자 등 고립되고 분리됐던 약자들이 어울렸다. 이들은 ‘다시 만난 세계’와 ‘임을 위한 행진곡’을 함께 부르며 서로를 격려했다. 대통령 윤석열을 끌어내리는 걸로 끝내지 않겠다는, ‘윤석열적인’ 모든 것들과 단절하겠다는 싸움이다. 대통령 윤석열을 잉태한 모든 야만과 폭력과의 싸움이다. ‘나라가 어두울 때 가장 밝은 것을 들고나오는’ 대한민국 시민들의 민주주의 수준에 근접조차 못한 세력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싸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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