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선데이] 관객 파워의 빛과 그림자

2024-10-04

공연에서 관객의 가치를 이야기할 때 나는 자주 극장의 어원을 인용하곤 한다. 극장 즉 시어터(theater)라는 말이 원래 객석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 야외극장은 세상 모든 극장의 원조로 통하는데, 이 극장 관객석이 테아트론(theatron)이다. 이 관객석 이름이 시어터로 발전하였으니 ‘극장의 주인은 관객’이라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공연하는 장소가 극장이니 당연히 ‘공연의 주인은 관객’이라는 말도 타당하다.

이러한 상식적인 이야기가 우리 공연에서는 잘 먹히지 않던 시절이 있었다. 전혀 통하지 않았다기보다는 ‘덜 통했다’라고 하는 편이 낫겠다. 지금처럼 공연시장이 발달하지 못했던 시절, 그러니까 불과 20여 년 전만 해도 우리의 공연시장은 ‘공급자 중심’이었다. 공급자 대부분은 예술가였는데, 이 부류의 공연 관객은 대부분 ‘초대 관객’이었다. 당시 이 ‘공짜표’를 들고 극장을 찾은 관객들의 반응은 대개 소극적이고 수동적이었다. 관객이 주인 행세는 고사하고 지나치게 차분한 분위기가 팽배한 공연장은 신전처럼 엄숙했다.

초대권 시절 공연 에티켓 이젠 옛말

‘내돈 내산’ 관객 새 공연 문화 주도

무대와 객석 거리 크게 줄어들어

극성팬들 지나친 힘자랑은 자제해야

이러한 엄숙한 분위기가 마치 당연한 극장 문화처럼 둔갑하는 데에는 이른바 ‘공연 관람 에티켓’이라는 게 한몫했다. “클래식 공연에서 악장과 악장 사이 잠깐의 포즈에는 절대로 박수를 치면 안된다.” 당시 불문율로 여긴 에티켓 가운데 하나다. 공급자 마인드에 투철한 관람 규범이다. 아직도 이 암묵적인 룰이 남아있긴 해도 과거처럼 강력한 힘을 발휘하진 못한다. ‘내가 좋으면 칠 수 있는 거 아냐’ 하는 정도로 느슨해졌다.

마치 동태처럼 굳어있던 우리 관객이 팔딱팔딱 살아있는 본연의 주체로 점점 거듭나게 된 것은 관객들의 직접 소비가 늘면서부터다. 내 돈 내고 내가 산 공연 티켓을 소지하고 극장을 찾는 관객은 떳떳하게 자기주장을 할 줄 안다. 그런 부류의 관객이 늘면서 초대권 지참 공연도 자연스럽게 자취를 감췄다. 이제 공연시장이 관객인 ‘소비자 중심’으로 바뀐 것이다. 여느 상품 시장에서 소비자가 왕이듯 공연에서도 ‘관객이 왕’인 시대가 활짝 열렸다.

왕처럼 군림하는 막강한 관객 파워의 표징은 셀 수 없이 많다. 매우 극적으로 그 힘이 드러난 가까운 예가 바로 지난달 초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있었던 오페라 ‘토스카’ 공연이다. 소프라노 월드스타 안젤라 게오르규의 오만방자한 태도에 대한 관객의 응징은 ‘내가 산 상품’에 대한 당연한 권리 주장이다. 당사자들 간에 사건 전후 혹은 막전 막후에 있을 수 있는 디테일한 사정을 감안하더라도 관객 위에 공연자가 군림할 수는 없다.

이 정도에 이를 정도로 관객이 활력을 회복하면서 공연 관람 규범도 점차 관객 편의로 바뀌었다. 이미 무너진 ‘악장과 악장 사이 박수 안 됨’과 같은 예가 발레에서도 있다. 다양한 발레의 테크닉 중에서 푸에테는 발레리나가 펼치는 최고난도 기술이다. 무용수는 한쪽 다리의 발끝으로 몸을 지탱한 채 다른 쪽 다리로 ‘말 채찍을 휘두르듯’ 32바퀴나 돈다. 아무리 감탄스러워도 까닥 실수하면 무용수가 큰 부상을 입을 수 있어 이 장면에서 관객 박수는 피하길 권했다. 그런데 요새 하는 ‘백조의 호수’를 보면, 이 장면조차 관객의 열렬한 박수에 무용수가 자연스럽게 호응하며 공연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무대와 객석의 거리가 현저히 줄어든 것이다.

여기까지 한 이야기가 사회의 변화에 따라 ‘관객이 왕’이 된 시대의 빛이라면, 그의 힘자랑에 눈살을 찌푸리다 못해 이제 새로운 관람문화가 필요할 때가 아닌가 하며 걱정하는 부분도 있다. 그림자다. 여러분 들어보셨는지. 이름마저 섬뜩한 ‘시체관객’은 공연 내내 옴짝달싹 못하고 시체처럼 숨죽인 채 공연을 봐야 하는 처량한 관객 처지를 빗댄 공연계의 은어다. 이를 조장하는 사람들은 그 공연이나 혹은 그 공연의 출연자를 극히 사랑하는 극성팬들이다. 자기애가 지나쳐 근처 관객이 작은 움직이나 미세한 소리만 내도 눈알을 부라리며 몹시 사납게 군다. 그 공격 대상이 된 관객은 공연장의 평화를 위해 영락없는 시체가 돼야 한다.

관객이 없는 공연은 존재할 수 없다. 뒤집어 말하면 공연의 존재 이유는 관객이다. 그 공연의 원리를 깨닫고 수동적인 객체에서 능동적인 주체로 거듭난 우리 관객들이 극장에서 스스로 보편적 규범을 찾아가는 일이 앞으로의 과제다.

정재왈 서울사이버대 부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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