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르시카를 떠난 나폴레옹처럼
"넓은 세상에서 뜻 펼쳐보자"다짐
가난한 집안 어머니 반대 무릅쓰고
전국 3대 명문 '대구사범학교' 진학
구미보통학교서 첫 합격자 탄생
응시 1천70명 중 입학 성적 51등
박정희(朴正熙)는 구미보통학교 6학년 시절 ‘나폴레옹’을 읽었다. 구미보통학교를 졸업하면 나폴레옹이 코르시카를 떠난 것처럼 상모리를 벗어나기로 결심했다.
구미보통학교의 교장선생님과 담임선생님은 정희가 대구사범학교로 진학 하기를 원했다. 정희가 다녔던 구미보통학교는 1920년에 개교한 이래 1932년까지 대구사범학교에 단 한 사람의 합격자도 배출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야무지고 똑똑한 정희가 대구사범학교에 갔으면 하고 바랐다. 만일 정희가 대구사범학교에 합격한다면 구미보통학교에서는 이보다 더 큰 경사는 없을 터였다. 소년 정희도 대구사범학교에 나쁜 이미지를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당시 대구사범학교에 입학한다는 것은 일류 학교를 다닌다는 강한 자부심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선생님들의 권유를 받은 정희는 대구사범학교로의 진학을 결심했다. 부모님이 허락하실지가 걱정이었다.
정희의 이러한 걱정에 선생님은 “사범학교에 가겠다는데 왜 마다하시겠니? 나라에서 학비도 대 주겠다. 기숙사에서 먹고 자고, 졸업만 하면 바로 선생님이 되어 돈도 벌 수 있다. 합격이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려운 것이 문제지만 정희 너는 합격할 것이다. 더 열심히 해라”라고 격려해주셨다.
그는 월사금과 하숙비가 많이 드는 인문계 중학교로 진학한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형편이었다. 선생님 말씀처럼 월사금을 면제받고 격려금까지 받으며 기숙사 생활을 하는 사범학교라면 부모님 허락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 대구 사범 학교다!”
정희는 생각했다. 좋은 면학조건이니 전국의 가난한 수재들이 너도 나도 몰려드는 학교가 아니겠나. 대구사범학교는 경성사범, 평양사범과 함께 3대 명문학교로 손꼽히는 곳이 아닌가. 지금껏 구미보통학교에서는 단 한 사람의 합격자도 내지 못한 학교이지 않은가.
정희는 다른 6명의 학생들과 함께 방과 후에 교사들로부터 특별수업을 받았다. 교사들은 어떻게든 한 명이라도 대구사범학교에 합격시키기 위해 열과 성을 다했다.
정희는 공부에 열중했다. 합격이냐 불합격이냐에 자신의 운명이 달려 있다는 자세로 임했다. 학교에서는 물론이고 집에서도 밤늦게까지 호롱불 밑에서 쏟아지는 잠과 싸우며 책을 읽었다. 정희의 6학년 성적은 2등과도 압도적 차이가 나는 뛰어난 1등이었다.
선생님의 격려를 받으며 그는 다시 나폴레옹을 떠올렸다. 작은 섬 코르시카의 촌놈이 뜻을 세워 프랑스의 황제까지 되었는데 그만한 일쯤 못 할 것도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래, 꼭 합격해야 한다! 상모리를 떠나 넓은 세상에서 내 뜻을 펼치려면 우선 큰 도시인 대구로 나가는 길을 뚫어야 한다.”고 이를 악물었다.
그가 대구사범학교에 응시하는 것에 대해 어머니의 반대가 심했다. 많은 식구의 하루 끼니를 때우기도 벅찼던 터라 비록 월사금을 면제 받는다 해도 뒷 바라지를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정희는 상주에 사는 막내 누나 박재희에게 대구사범학교 응시를 반대하는 어머니를 설득해달라고 편지를 쓰기도 했다.
당시의 상황에 대하여 막내 누나 박재희(朴在熙)의 증언은 다음과 같다.
“동생 정희는 대구사범학교에 응시했습니다. 저희 집에서는 학비를 댈 엄두도 못 내고 해서 저도 내심으로는 진학을 포기했으면 하고 있었어요. 구미보통학교의 교장선생님과 담임선생님들이 오히려 우리 부모님을 설득하여 시험을 치도록 했습니다. 어머니는 정희가 시험에서 떨어지도록 빌었다고 해요. 합격하고 진학을 못 하면 한이 생긴다고 차라리 떨어지길 바란거지요.”
가족들의 바람과는 상관없이 정희는 1932년 4월 1일, 대구사범학교 제4기생으로 당당히 입학했다. 그해 대구사범학교의 입학정원은 100명이고 그중 한국인 90명, 일본인 10명이었다. 당시 식민지 조선에는 경성사범, 평양사범, 대구사범 단 3곳의 사범학교만이 존재했다. 경성사범은 일본인과 조선인을 50명씩 뽑았고, 평양과 대구사범은 9대1의 비율로 조선사람을 많이 뽑았다. 월사금 등을 일절 받지 않는 데다 용돈조로 격려금까지 지급되고 졸업과 동시에 교사로 발령이 났다. 당시 식민지 조선에서 사범학교는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며 무지막지한 높은 경쟁률을 자랑했다.
사범학교는 전국에서도 수재들만 응시했다. 그해 대구사범의 총응시자는 조선인, 일본인 합하여 모두 1,070명었고, 정희의 입학성적은 51등이었다. 그는 구미보통학교 제11회 졸업생이었는데 이 학교가 생긴 이래 대구사범학교에 합격하기는 정희가 처음이다.
드디어 정희는 상모리를 벗어나게 되었다. 대구사범학교에서 장차 선생님이 되기 위한 공부를 하게 된 것이다. 교사가 된다는 것이 결코 큰 출세라고는 할 수 없다. 그렇지만 적어도 상모리에서 모래바람을 쐬며 좁은 땅에서 오직 흙만 파는 농부 신세만은 면할 수가 있었다. 어린이들을 가르친다는 것은 지위의 높고 낮음을 떠나 값진 일이기도 했다.
합격의 기쁨도 잠시였다. 당시 사범학교의 교육목표는 가난하면서도 우수한 조선인 학생들을 선발하여 철저한 일본 교사로 만드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일본이 식민지정책(植民地政策)의 일환으로 교육을 통하여 조선을 일본화(日本化)시키는 수단으로 삼고자 했던 것이다. 사범학교는 교사사관학교(敎師士官學校)라고 할 만큼 학칙과 규율이 엄격했다. 늘 긴장을 풀 수가 없었다. 먹는 시간, 공부하는 시간, 쉬는 시간, 잠자는 시간을 정해진 시간표대로 어김없이 지켜야만 했고 잠시도 벗어날 수가 없었다. 24시간 내내 군인들이 병영에서 생활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전 학생을 기숙사에 머물게 하여 기숙사 사감과 상급생의 감시에서 24시간 교육과 훈련 감시로 일관했다.
그는 기숙사에서 먹고 자고 공부했다. 동급생은 물론 상급생과 함께 방을 썼다. 처음 얼마 동안은 새로운 생활에 익숙해지는 데만 정신을 집중했다. 기숙사 생활은 생각했던 것만큼 재미있는 것이 아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그가 원하지 않던 낯선 세계에 부딪혀야 했다. 당시 사범학교의 교육목표가 마음에 들지 않았고, 엄격한 학칙과 규율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교실에서 공부하는 내용 또한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해서 꼭 배워야 하는 미술, 음악, 공작 등이 그랬다. 높은 학문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가르치는 기술을 중심으로 짜여진 교육 내용이어서 흥미있게 빠져들 수가 없었다. 교과서 이외의 책은 학교 당국의 검열도장을 받지 않으면 읽을 수도 없고 특히 금서(禁書)를 읽다가 퇴학당하는 학생들이 많았다.
그러므로 100명이 입학을 해도 졸업은 대개 70명 선에 머물렀다. 주로 금서를 읽다가 쫓겨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 여학생과 연애를 해서도 안 되고, 술·담배를 해도 안 되며, 무단결석, 조행이 나쁜 학생은 가차 없이 퇴학 처분을 내렸다.
가장 참을 수 없었던 것은 조선인과 일본인에 대한 민족 차별이었다. 그때마다 그는 심한 좌절감을 맛봐야 했다.
한국인 학생들은 학교에서뿐만 아니라 방학 때는 집에까지 고등계 형사들이 수시로 찾아와서 독서 경향이나 언동까지 조사하여 가혹한 통제와 감시의 눈길을 늦추지 않았다.
그런 반면에 일본인 학생들은 도서검열을 받지 않고 마음대로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일본인 학생에게는 한없이 관대했다. 기숙사 생활에서부터 일본 학생들과 조선 학생들은 차이가 났다. 일본 학생들의 기숙사는 시설이 좋고 깨끗했다. 조선 학생들의 기숙사는 군인들 막사처럼 으스스했다. 기숙사의 급식도 일본인은 쌀밥에 잡곡을 약간 섞는 정도인데 조선인은 잡곡에 고구마를 섞어주는 급식을 하여 변비가 생기기도 했다.
그런 차별 정책은 학교를 졸업해도 마찬가지였다. 일본인은 주로 생활 환경이 좋은 도시 학교로 배치되었고, 조선인은 외진 시골 학교로 가야 했다. 일본인 교사는 조선인 교사보다 월급이 60퍼센트나 더 많았다. 같은 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자격을 가졌는데도 그처럼 대우가 달랐던 것이다.
가장 감수성이 예민할 때 민족 차별의 실상을 체험했던 학생들은 일본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다. 일제의 황민화(皇民化)교육이 심화될수록 조선 학생들의 반발도 적지 않았다. 민족혼을 되찾는 기운이 깔리기 시작했고, 민족적 의분심이 불타올랐다.
대구사범학교에 입학한 정희도 조선인과 일본인의 민족 차별 교육에 불만이 움트기 시작했다. 반골 기질이 있는 그로서는 조선인 학생에 대한 차별이 노골적으로 자행되는 상황을 두 눈으로 빤히 보고, 직접 당하면서 학교생활과 학업에 대한 열의가 생기지 않았다. 일본인들로부터 무시당하지 않으려면 나 스스로 힘 있는 사람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선생이 되어도 이 차별 대우에서 벗어날 수 없지 않은가? 그는 이런 생각을 하며 학교 공부보다 책을 읽고 몸을 단련하는 데 더 큰 힘을 쏟게 되었다. 그는 이 기간 동안 학업에는 흥미를 잃었지만, 세계문학전집, 플루타르크 영웅전, 고전, 역사, 소설, 전기 등 다양한 독서를 하면서 지적세계를 넓히고 교양을 쌓았다. 당시 그의 적성에 맞았던 것은 교련과 체육이었기 때문에 사격과 총검술, 검도, 권투, 육상, 축구, 기계 체조 등에 많은 흥미를 가졌고 뛰어났다. 그는 나팔을 부는 것을 좋아했다. 사범학교 동급생 가운데 그보다 나팔을 잘 부는 학생은 없었다. 나팔은 그의 오랜 친구였다. 그는 구미보통학교 때부터 나팔을 불었다. 그는 울적할 때마다 상모리 뒷산에 올라가 나팔을 불었다. 그는 나팔을 불면 답답했던 마음이 뻥 뚫리는 느낌을 받았다. 나팔만큼 그의 마음을 잘 받아주고, 또 풀어주는 것도 없었다.
5년 동안에 걸친 그의 대구사범학교 생활에서 학업성적은 좋지 않았다. 구미보통학교 시절 늘 일등만 도맡아 했던 그는 사범학교에서는 해를 거듭할수록 성적이 곤두박질쳤다.
1학년 시절, 97명 중 60등
2학년 시절, 83명 중 47등
3학년 시절, 74명 중 67등
4학년 시절, 73명 중 73등
5학년 시절, 70명 중 69등
그의 성적은 완전 바닥이었다. 우등생에서 열등생으로 바뀐 것이다. 학교생활 역시 좋지 않았다. 당시 생활 기록을 살펴보면, 품행을 의미하는 조행(操行) 평가는 5년 동안 ‘양, 양, 양, 가, 양’이었다. 담임을 맡았던 교사가 내린 평가 역시 낮았다. 1학년 때 ‘보통’이다가, 2학년 때는 ‘음울하고 빈곤한 듯 함’, 3학년 때는 ‘빈곤, 활발하지 않음, 다소 불성실’, 4학년 때는 ‘불활발, 불평 있고 불성실’, 급기야 5학년 때는 평가란이 ‘공란’이었다.
그는 결석도 잦았다. 2학년 10일, 3학년 41일, 4학년 348일, 5학년 41일로 결석을 밥 먹듯이 했다. 장기 결석을 한 데는 나름 사정이 있다. 기숙사비를 마련하기 위해 고향에 가서 돈을 마련될 때까지 기다려야 했기 때문이다.
당시 대구사범학교는 장학금 제도가 있었다. 40등 이내에 드는 학생들에게는 매달 7원의 관비를 지급했던 것이다. 7원은 큰 액수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적은 액수도 아니었다. 대략 쌀 반 가마니 값이었다. 학생들은 식비로 4원 50전을 내고 기타 기숙사 부대비용으로 2원 가량을 냈다. 7원으로 풍족하지는 못해도 학업을 하는데 어려움은 없었다.
그렇다면 그는 왜 열심히 공부해 관비를 받지 않았던 것일까? 공부 머리가 없어서일까? 그렇지 않다. 가난한 부모님 아래서 태어났지만 공부 머리 하나만큼은 타고났다. 그가 공부를 못했던 것은 공부를 안 했기 때문이다. 공부와 담을 쌓았기 때문이다. 그는 입학 전만 하더라도 관비를 타 식비와 기숙사비를 충당하여야 한다고 다부지게 마음먹었다. 하지만 입학식에 참석하고 그런 생각은 싹 사라졌다.
히라야마 교장의 입학식 훈시는 목구멍에 걸린 가시처럼 찝찝하고, 불쾌했다. “먼저 여러분의 입학을 환영한다. 여러분은 모두가 전지전능하신 천황폐하의 은덕으로 여기에 모였다. 천황폐하의 충실한 백성이 되어라…….” 그는 공부를 잘해야 할 이유가 천황 때문이라면, 천만금을 준다 한들 사양하겠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여기에다 사범학교 교육 내용도 공부를 안 한 이유로 꼽을 수 있다. 당시 사범학교 교과과정(敎科課程)은 일본어, 조선어, 영어, 한문, 교육학(교육원리, 교육사, 교육심리, 교육철학), 경제학, 수학, 생물, 화학, 물상, 역사, 지리, 음악, 미술, 서예, 체육 등이며 교사로서 필요한 실기교육을 중요시했다. 따라서 군인의 꿈을 품었던 그는 자신의 능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었다.
그는 학업에서는 바닥을 기고 기숙사비를 내지 못해서 고향으로 내려가 장기간 결석을 해야 하는 이중고(二重苦)에 시달리고 있었지만 군사 훈련과 체육에는 열성적으로 참여하였고 뛰어났다. 학과 중에서 그래도 성적이 ㅤㄱㅙㄶ찮은 과목은 역사, 지리, 조선어였다.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은 탓에 그의 자존심은 뭉개질 대로 뭉개졌다. 기숙사비 문제는 한 달에 한 번씩 그의 가슴을 아리게 치고 들어왔다. 그럴 때마다 그는 나팔을 들고, 가슴 한 켠에 똬리를 튼 복잡다단한 심정을 나팔을 불어 한껏 토해냈다. “튀어나오는 적들은 모두 모두 죽여라.” 박정희에게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적’은 곧 ‘가난’이었고, 그는 가난이 자신의 한(恨)이자, 민족의 한이었고, 나라 잃은 설움이었다. 그의 생각은 민족혼을 되찾고 잃어버린 조국을 되찾고 민족의 가난을 극복하자는 신념으로 채워져 갔다.
글=박정희아카데미 부속 박정희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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