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칠 교수의 일기는 1993년 〈역사앞에서〉란 제목으로 창비에서 출간되었다. 이 일기는 1945년 11월 29일자 뒤쪽부터 남아있었는데, 그 앞의 일기가 사라진 것으로 보였다. 유물을 보관하고 있던 필자의 아들 김기목 교수(통계학, 전 고려대)가 사라진 줄 알았던 일기를 최근 찾아냈다. 1945년 8월 16일에서 11월 29일(앞쪽)까지 들어 있다. 중앙일보는 이 일기를 매주 토요일 원본 이미지를 곁들여 연재한다. 필자의 다른 아들 김기협 박사(역사학)가 필요한 곳에 간략한 설명을 붙인다.
8월 16일 개고 덥다.
아침에 부면장 조필환(曺必煥) 씨가 찾아와서 일본이 항복한 사실을 전하고 앞으로의 지도를 요청한 바 있었으나 나는 어떠한 세상이 오건 한낱 학구(學究)로서 여생을 보낼 작정이므로 주경야독(晝耕夜讀)함에는 우순풍조(雨順風調)만이 염원이고 세상사는 나의 아랑곳할 바 아니라고 말하였다.
기연미연했더니 오전 중에 미쿠리야(御廚) 씨 부인이 달려와서 예금 전액을 내어달라고 애걸복걸함을 보고 비로소 적확한 사실임을 알았다. 유 서기를 제천 보냈더니 돌아와서 아이들처럼 좋아하고 올 때 주재소에서 서류 불사르는 걸 보았다고 한다.
오늘부터 매일 숙직하도록 말하고 조합장에게 부탁해서 쌀 한 가마니를 얻었다.
시간 파한 후에 여느 때처럼 소채 씨를 뿌리노라니 아내는 참으로 하릴없는 백성이라고 익살을 피웠건만 나는 내일 이곳을 떠나는 한이 있더라도 뿌릴 씨는 뿌리고야 말리라고 생각하고 그저 웃기만 했다.
저녁때 보례(保禮)의 서 박 양인이 찾아와서 대단히 좋아하고 건국위원장에 안재홍 씨, 대통령에 김구, 총리대신에 이승만, 외무대신에 여운형, 육군대신에 김일성 제씨가 취임하기로 결정된 라디오가 들어왔다는 말을 전하였다. 우리들은 굳은 악수를 하고 이 기쁜 결말이 아주 적당한 시기에 이루어졌음을 축복하였다. 왜냐하면 백성들이 일정(日政) 하의 고초를 뼈에 저리게 느낄 수 있었고 그리고도 우리 삼천리가 전장화(戰場化)해서 한 겨레끼리 서로 해치기에 이를 직전에 이처럼 좋은 해결이 지어졌음으로써이다. 전부터 아내와도 이러기를 충심염원했던 바이다.
[해설 : 여러 지도자의 이름이 한자로 표기된 중에 김구만이 “金玖”로 잘못되어 있다. 해방 전 김구(金九)의 이름은 활자화되어 전해지는 일이 적었던 것 아닐까?]
경성일보에 소위 대조(大詔)가 발표되었었다. 비통한 글이었다. 일본 신민 된 자 이를 읽고 어찌 통곡치 않을 수 있으랴.
저녁에 면에서 긴급회의가 있다기에 가보았다. 역시 잘난 사람의 객쩍은 노릇. 아직도 지극히 충성된 신민인 척하는 그가 오늘날은 어떠한 태도를 지닐까 생각하니 한심스럽기도 하다. 이 점은 내 자신 오십보백보일 터이지마는.
박제훈(朴齊勳) 씨가 와서 전에 조선사람 관리 나부랭이의 유난히 각박하던 일을 말하고 앞날에 대해서 약간의 기우를 품는 듯하기에 그네들은 지위와 생활의 보장이 없었기 때문에 무항심(無恒心)이므로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없단 말을 일러주었다.
병중의 아내가 너무 기뻐서 떡과 술 준비를 하느라고 밤늦게까지 애쓰는 것이 고맙기도 하고 불안스럽기도 하다.
밤에는 자리에 들어도 한동안 잠들지 않았다. 내 마음 흥분했음일까.
오늘 기봉이의 컨디션이 매우 좋았다. 4월 14일(구력 삼월삼진날)로부터 125일째. 주먹을 빨다 지치면 뒤치려고 몸을 들먹이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고 궁둥이의 각도만 엄청나게 돌아간다. 이즈음은 전혀 우는 일이 없으니 그 어머니의 지성에 말미암음이겠지만 또한 기봉이가 순하디 순한 때문이리라.
[해설 : 1913년생의 필자는 1937년 경성법전 졸업 후 금융조합에 근무하다가 1942년 경성제대 사학과에 입학했으나 1944년 학병 지원 거부로 징용 대상자가 되자 금융조합으로 돌아가 해방 당시 제천군 봉양면 조합의 이사로 재직하고 있었다. 이사는 현지인 조합장과 별도로 중앙의 연합회에서 파견하는 책임자였다. 가족은 아내 이남덕과 생후 4개월의 아들 기봉이 있었다.]
8월 17일 개고 덥다. [오후에 소낙비]
아침부터 저금 내어달라고 부탁하러 오는 사람 때문에 밥 먹을 여가도 없을 지경.
직원들에게 평소보다 더 자중해 달라는 말을 하고 한 시간쯤 일 보다 곧 문 닫고 학교로 가니 벌써 많은 군중이 모여서 환호를 부르고 면장 한필수(韓弼洙) 씨가 단상에 올라서 그 특이한 제스추어로 일장연설을 하는 중이었다. 앞으로 불살라 버릴 일본기를 밟으면서.
끝난 뒤에 만세를 부르면서 가두행렬. 직원들과 보례서 온 박, 서 양군과 함께 환담 장시간. 노래도 하고 만세도 부르고 내 일생 중에 가장 기쁜 하루가 아닐까.
이것이 꿈이라도 좋을 것인데 하물며 생시이랴.
8월 18일 개고 덥다.
아침에 하야사카(早坂) 씨가 찾아와서 간다는 하직인사 겸 저금을 내어달라는 말을 하러 왔었다. 간밤엔 내가 병원에 간 동안에 사카타(坂田) 씨가 두 번이나 찾아왔다고 하고 길에서 다케우치(竹內) 씨와 오다(小田) 씨 부인이 만나서 역시 같은 부탁이 있었다.
그들이 우리 땅에 와서 잘했건 못했건 이제 고국으로 쫓겨가는 통에 여비 한 푼 없다고 하니 매우 난처한 일이었다. 더욱이 평소에 그들의 여유금(餘裕金)을 전부 받아오던 조합으로서는 인정으로 보아서 매우 미안한 점이 있으므로 한 세대에 2백 원씩 내어주기로 하였다.
하야사카 씨는 풍문에 아침저녁으로 운다더니 부석부석하니 충혈된 눈으로 맥이 없고 간밤에도 군중이 돌질을 해서 유리창경을 부쉈고 아이는 벽장 속에 숨겨두었노라고 하기에 지방의 한 사람으로서 유감인 뜻을 말하고 앞으로도 이웃나라 사람으로서 의좋게 지내자고 삭막한 회견을 마치었다.
오후엔 신리(新里) 천남(泉南)의 풍물이 왔으므로 조합 일동이 정문에 나서서 내가 선창으로 조선독립만세를 삼창하였다. 마을사람들도 매우 좋아서 화창(和唱)하였다. 그리고나서 이내 행진을 계속하는 것 같더니 잠시 후 수선해지므로 내다보니 미움받는 면서기를 찾아서 그를 추적하느라고 야단이었다. 류재홍(柳在洪) 군이 우연히 밖에 나갔다가 면서기로 오인되어서 꼼짝없이 포위를 당했는데 그 사람들 중에 알아보는 사람이 있어서 “아니다. 조합서기다.” 하고 외쳐서 겨우 봉변을 면하고 당황히 사무실로 달려왔는데 마을사람들도 이 광경을 보고 새삼스레 조합을 칭송하였다. 이 통에 면서기는 모두 도망해 버렸다.
모두들 이름을 환성명(還姓名)했으나 우선 서로 만났을 때 무어라 인사했으면 좋을까, 무어라 부르면 좋을까 하는 것이 문제였다. 기쁘고 어려운 한 가지 문제다. 아침마다 “오하이요 고자이마스” 하던 사람들도 그저 고개만 꾸뻑할 뿐.
면서기 이아무개가 어제밤에 연박(硯朴)서 맞았다는 소문. 그는 저번 식량조사 때 남의 집 죽 쑤는 솥뚜껑을 열고 막대를 죽솥에 넣어 흔들면서 죽이 너무 걸쭉하다고 야단했다고 한다. 저희들은 술 빚고 떡 해서 아이 돌잔치를 야단스럽게 했으면서.
학교에 선생 세 사람이 몹시 맞았다는 소문. 청년훈련소생이 배가 고파서 간혹 결석을 하면 그 이튿날은 몹시 매를 때리기 때문에 집에 가면 앓아눕는 일이 비일비재하다는 소문이 파다하던 그들이다.
용산(龍山)의 일본 군대가 일단 놓았던 무기를 다시 잡고 또 경원선(京元線)을 폭파했기 때문에 김일성 군의 경성 입성이 늦어진다는 뉴스를 듣고 직원들 중에 다소 걱정하는 마음을 품는 사람들이 있는 듯하므로 세계 대세는 이미 결정되었는데 일본의 현지군으로서 망동(妄動)하는 일이 있다면 그는 스스로 평화 회복의 조서(詔書)에 배역(背逆)함이고 따라서 국가의 자멸을 초래하는 우거(愚擧)이니 개의할 것 없다고 일러주었다.
밤에는 백운면장이 신변의 위험을 느껴서 자정 가까이 도망해 와서 자고 갔다.
8월 19일 개고 덥다.
아침에 학교의 신 선생이 찾아와서 자기마저 고향으로 가겠다 하므로 학교의 책임자로서 끝까지 지키는 것이 좋다고 아무리 권했으나 어제 봉변한 일이 있으므로 좀처럼 듣지 않았다.
우리는 감나무 밑에 누웠다가 우연히 감이 떨어져서 저절로 우리 입에 굴러들어왔다. 그러니 무턱대고 이 요행을 기뻐함보다도 하루바삐 우리의 실력을 길러서 전체(全體)의 질적 향상을 도모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면 무엇보다 교육이 급선무일 것이다. 비단 아동뿐만이 아니고 청장년층 전부의 재교육을 시급히 해야 할 것이다.
소위 대동아전쟁 초기에 일본이 필리핀과 버마를 독립시켜주었을 때 그네들도 역시 오늘날 우리들처럼 기뻐했을 것이다. 그러니 기뻐 날뛰는 것만이 우리의 능(能)이 아니다. 하루바삐 훌륭한 나라, 세계에 으뜸가는 나라를 만들도록 모든 우리가 힘써야 할 것이다.
전체(全體)의 질적 향상은 그 전체를 구성하는 각개(各個)의 질적 향상 이외엔 다른 첩경이 없을 것이다. 좋고 기쁘다. 너무 좋고 기뻐서 아주 미칠 지경이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이 흥분만을 지속할 것이 아니다. 하루바삐 동진(東震)공화국의 한 구성분자인 나의 질적 향상에 매진해야 할 것이다.
[해설 : 필자는 새 국가의 이름을 “동진공화국”으로 상정하고 있었다. “조선”, “고려”, “한” 등 여러 이름이 떠오르고 있던 상황에서 그는 “동진(東震)”을 가장 적합한 민족국가의 이름으로 생각한 것이다. 독립운동 과정에서 여러 파벌이 활용함에 따라 특정 파벌을 대표하는 의미를 갖게 된 다른 이름보다 아직 사용된 적 없는 이름이 좋겠다고 생각한 것 같다.]
면서기가 모두 달아났으므로 우익(羽翼)을 잘린 전 면장 한필수 씨가 지방자치위원회 위원장을 사임해서 나에게 그 후임을 보아달라는 말이 있었으나 고사하였다. 나는 지금 그러한 일로 해서 내 서재를 떠나고 싶지 않다.
대규(大圭)를 쌀 두 말 지워서 아버지께 보냈다.
[해설 : 박대규는 필자의 생질(둘째 누님의 아들)로 당시 같은 조합 직원으로 있었다. 후에 금융조합이 농협으로 개편된 후 농협 임직원으로 오래 재직했다. 필자의 부친은 고향인 경북 영천군 청통면에 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