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6년 개정판으로 다시 묶은 박완서 단편집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에 수록된 ‘재수굿’을 소개하려고 한다. 박완서는 세태 묘사, 풍자에 탁월한 작가다. 재수굿은 친구의 소개로 매일 두 시간씩 방문 가정교사를 하는 대학생이 화자인 1인칭 소설이다.
나는 일찍부터 부잣집이라기보다는 부잣집 아이라는 것에 대해 단순하고도 확고한 선입관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소년의 엄마는 내 편견을 깨고, 아이가 막내아들이니 학습보다는 형처럼 레슬링이나 몸싸움도 가끔 하면서 지내 달라고 한다. 그래서 나는 소탈한 그들의 모습에 적잖이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시험 결과를 보고서는 92점을 받았는데 100점을 받지 못하게 지도했냐고 나무란다. 그리고 족집게과외선생처럼 답만 가르치라는 요구와 함께 호칭도 선생님에서 학생으로 격하시켰다. 나는 가정교사 노릇을 그만둘 생각이었고 마지막으로 여자의 오만한 콧대를 꺾어놓을 짧고도 격정적인 웅변을 한마디 내뱉고 뛰쳐나오고 싶었지만, 한 달 과외비 2만 원이 머릿속에 떠오를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마침내 보수를 받을 날이 왔고, 그날부터 사흘이 지난 날 부인이 말했다.
“우린 해가 진 후엔 절대로 돈 지불을 안 하기로 돼 있어요.” 무속에 빠진 자들의 논리다.
소설 속 무속에 빠진 부잣집의 가장은 검찰청에 다니는 관료인데. 이 부부의 행실을 읽다 보니,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 대통령과 총리 부부의 무속 논란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마땅히 지급해야 할 비용(과외비)을 떼먹으려는 수작에서, 도도하고 오만하던 부인이 돼지머리 앞에서 손이 발이 되도록 무당에게 싹싹 비는 모습을 보고 소설 속 대학생인 나는 웃음이 터져 나왔지만, 독자들은 그럴 수가 없을 것 같다.
무속에 빠져, 헌법과 양심보다 무속의 논리로, 자신들의 이익에 맞게 권력을 행사했다는 뉴스를 보고 있는 요즘 설마 그럴 리가 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이 소설을 한번 읽어보라고 권하며, 작품 속 재수굿 장면을 옮겨 적는다.
부인은 빌고 절하고, 빌고 절하느라 얼굴에서 땀이 비 오듯 하고 있었다. 할머니가 창대를 다시 놓았다. 창은 또 휘청댔다. 할머니는 얼른 창을 잡더니, “암만해도 관재구설이 무섭다고 하시는구먼” 했다. 부인이 황망히 오백 원짜리를 한 움큼 갖다가 할머니의 돌 띠 사이에 주섬주섬 끼워주고 오천 원짜리는 창끝에 꽂힌 돼지 대가리의 삐죽한 주둥이에 물렸다.
부인의 표정은 초조와 불안과 공구로 오그라들고 초라해 뵀다. 그 도도하던 기품은 어디로 갔는지 그래서 전연 딴사람 같았다. 할머니는 아까와 비슷한 말을 지껄이며 다시 시작했다. 이때 이 집 바깥주인이 들어왔다. 관청이 파하긴 아직 이른 시간인데 아마 굿을 위해 들어온 것 같았다. 부인이 반색을 하며 남편의 귀에 뭐라고 속삭였다. 남편의 얼굴에도 당장 부인을 닮은 짙은 초조와 공구가 떠올랐다.
부부가 나란히 돼지 대가리 앞으로 다가가더니 공손하게 여남은 번쯤 절을 하고 나서 고개를 깊이 숙이고 두 손바닥을 싹싹 문질러 빌기 시작했다. 검찰청이란 위엄 있는 관청에 다닌다는 점잖은 양반이 돼지 대가리의 은총을 구걸하는 “싸악싸악” 소리가 느닷없이 내 뱃속으로 힘찬 웃음을 촉발했다.
오영애 울산환경과학교육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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