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노숙자 할머니와 평행우주

2024-12-25

새벽과 아침의 경계선에 있는 오전 6시지만 서울역은 많은 인파로 붐볐다.

대전행 KTX 열차를 타려면 아직 한 시간이나 남았다. 오전 9시 KAIST 특강 시간에 맞추기 위해서는 서울역에서 간단한 아침 식사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맥도널드에서 빅 브렉퍼스트와 커피를 주문해서 테이블에 앉았다. 그런데 갑자기 심한 지린내가 났다. 식사를 하다말고 쳐다보니 남루한 옷을 입은 노숙자 할머니가 테이블 옆에 우두커니 서서 쳐다보고 있었다.

청소를 하던 직원이 달려와 할머니를 빗자루로 떠밀면서 나가라고 소리를 질렀다. 나는 직원에게 그러지 말라고 야단을 쳤다. 그리고 할머니께 아침 식사를 하셨느냐고 물었다. 할머니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할머니께 잠시만 기다리시라고 한 후 음식을 주문하기 위해 대기줄에 섰다. 그런데 갑자기 의자 위에 두고 온 가방이 생각 났다. 가방 속에는 여권과 현금 그리고 컴퓨터가 들어 있었다. 만약, 노숙자 할머니가 가방을 가지고 달아나면 어떡하지 하는 불안과 함께 자꾸만 눈길이 그쪽으로 갔다.

마침내 할머니를 위해 빅브렉퍼스트와 커피를 쟁반에 담아 와서 식사를 권했다. 처음엔 할머니와 아침 식사를 함께할 생각이었지만, 지독한 냄새 때문에 도저히 식사를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열차 시간을 핑계 삼아 먼저 자리를 떴다.

아침 햇살 속에 깨어난 가을 들녘의 풍경 위로, 빅 브렉퍼스트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승강장으로 걸어가는 나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노숙자 할머니의 얼굴이 오버랩되었다. 그때 할머니는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혹시, 치매로 인해 나를 자신의 아들로 생각하진 않았을까. 강의 내용을 검토하기 위해 자료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지만 집중하기 어려웠다.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의자를 뒤로 젖히고 눈을 감았다. 기차는 나의 복잡한 마음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대전을 향해 속력을 내며 달렸다.

특강을 마치고 귀경하는 열차 안에서도 아침에 일어났던 일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왜 나는 노숙자 할머니와 식사를 함께하지 못했을까. 사람의 몸에서 나는 냄새가 그렇게도 참을 수 없었던가. 왜 나는 열차 시간을 핑계로 먼저 자리를 떴을까.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이 나에게는 슬로건에 불과한 것인가.

사실 노숙자 할머니를 처음 본 순간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그런데, 나의 스승이셨던 김동길 교수님께서 오래전 광주행 고속버스 내에서 문둥병 환자와의 동승을 거부하는 승객을 위해 당신의 자리를 양보하시고 그 환자와 나란히 앉아 광주까지 가셨던다는 말씀이 생각났다.

그래서 김 교수님의 제자라면 최소한 이 정도는 해야겠다는 생각에, 나도 할머니께 식사를 대접하고 함께 식사를 하기로 마음 먹었지만 결국 그렇게 하지 못했다.

이런 자괴감으로 나 자신과의 부정적인 대화를 하던 중에 창가에 비친 저녁 노을을 바라보다가, 문득 최근에 읽은 미치오 카쿠 박사의 ‘평행우주(Parallel Universe)’가 떠올랐다. 평행우주는 가상의 우주 모형으로 자신이 살고 있는 우주가 아닌 같은 시간을 공유하는 평행선상에 위치한 또 다른 세계를 말한다. 내가 선택하지 않은 또 다른 내가 살고 있는 세계인 것이다.

넓은 의미로 평행우주는 여러 개의 우주가 있다는 다중 우주를 의미하기도 한다. 즉, 차원은 같지만 다른 세계인 것이다. 문득, 노숙자 할머니도 또 다른 세계에서는 행복한 일상 생활을 하고 있진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할머니는 오늘 아침에도 깨끗한 옷을 차려 입고 웃음이 가득한 집에서 가족들과 식탁에 둘러앉아 식사를 하고 계셨을 것이다.

손국락 / 보잉사 시스템공학 박사

Menu

Kollo 를 통해 내 지역 속보, 범죄 뉴스, 비즈니스 뉴스, 스포츠 업데이트 및 한국 헤드라인을 휴대폰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