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자신도 속는 가면 쓴 ‘우울증’

2024-09-30

남편 손에 이끌려 진료실을 방문한 중년의 한 아주머니는 정신과 진료를 받는 것이 못내 못 마땅한 표정이었다. 본인은 몸이 아픈 데 왜 정신병자취급을 하는 것이었다. 환자는 수개월동안 원인을 알 수 없는 두통, 식욕부진, 만성 피로감, 두근거림 등의 다양한 신체증상으로 고통을 받았고 내과, 신경과, 심지어는 대학병원 등을 전전하며 여러 가지 검사를 받아왔다고 한다. 하지만 그때마다 특별한 이상이 없다는 말만 들어왔고 막연히 ‘신경성'이라는 애매한 진단만을 받았다고 한다. 환자는 이상이 없다는 의사의 말에 기쁘기보다는 “나는 진짜 아픈데…"하는 마음에 그럴수록 더욱 답답한 심정만 커졌다고 했다.

자세한 면담 및 진찰 결과 환자의 진단은 우울증이었다. 이처럼 환자 스스로는 정작 우울한 기분을 느끼지 못하지만 우울증으로 진단되는 경우를 의사들은 ‘가면우울증'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우울증은 하루 종일 지속되는 우울한 기분 혹은 즐거움의 상실 같은 기분 증상과 불면증, 식욕장애, 피로감 등으로 표현되는 생리적 증상을 동반한 일련의 증후군을 말한다. 또한 이런 기분 증상과 생리적 증상 외에도 무가치감, 절망감, 과도한 죄책감, 자살사고 등과 같은 부정적 생각에 사로잡히는 경우도 매우 흔하다.

반면 가면우울증은 우울한 기분 같은 증상을 스스로 자각하지 못하고 소화불량, 두통, 피로감, 두근거림 같은 모호한 신체증상을 주로 인식하기 때문에 정확한 진단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흔하다. 예를 든 사례에서 환자는 면담 결과 오랜 고부갈등과 대학 졸업반인 자식의 취업 문제로 스트레스를 받아왔고 불면증, 불안, 초조, 자살사고 등 우울증의 주요 증상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본인은 신체증상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어 우울증을 스스로 알아채지 못한 것이었다.

이런 가면우울증은 서구 사회보다 문화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잘 표현하지 못하고 억압하는 경향이 많은 우리나라에서 특히 발병률이 높은 것으로 되어 있는데 흔히 ‘화병’이라 부르는 경우도 여기에 해당되는 경우가 많다. 가면우울증 환자들의 내면 심리에서 감추어 둔 분노 감정을 흔히 발견하게 되는데 자신의 감정을 감추고 속으로만 새기는 경우 고인 물이 썩듯이 자연스럽게 표현되고 흐르지 못한 감정이 결국 병을 일으키는 것으로 판단된다.

이런 가면우울증은 연령에 따라 그 모습이 다르게 나타나기도 한다. 소아청소년의 경우 학교거부, 학습장애, 반항 등으로 나타나기도 하며, 4,50대의 중년은 앞선 신체적 증상으로, 노인에서는 기억력, 집중력 저하가 주된 가성치매(치매로 오인된 우울증)로 나타나기도 하여 정확한 진단과 빠른 치료를 방해한다. 가면우울증은 신체질환으로 오인되므로 불필요한 검사나 치료에 많은 돈과 시간을 낭비하기도 하고, 오랜 치료에도 호전되지 않은 증상으로 스트레스의 강도가 점점 강해져 실제로 고혈압, 심장병, 당뇨 등 스트레스와 연관된 신체질환을 일으키기도 하며, 우울증의 악화로 자살 같은 극단적 행동을 유발하기도 하는데 그 위험성이 있다.

치료는 대부분 항우울제를 처방하는데 최근 약물들은 특별한 부작용이 없이 빠른 치료효과를 보이고 있어 예후는 매우 양호한 편이다. 이런 가면우울증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자신과 주위 환경에 대한 긍정적 사고방식이 매우 중요하다. 많은 우울증 환자들에서 ‘나는 안돼’ 혹은 ‘내가 항상 이렇지 뭐’와 같은 부정적인 생각을 반복적으로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나 스스로가 사랑하고 인정하지 않는 ‘나’는 다른 사람도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또한 요즘 같이 일조량이 줄어드는 가을과 겨울철에는 우울증의 발병률이 높아질 수 있으므로 항상 규칙적인 생활리듬과 활동량을 유지하고 식이, 운동, 수면, 휴식 등 마음과 신체에 밀접한 영향을 주는 활동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우울증은 마음의 감기’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누구나 흔히 걸릴 수 있고 잘 대처하면 쉽게 극복할 수도 있다는 뜻일 것이다. 그러나 노약자나 면역력이 떨어진 기저 질환자는 감기도 방치하면 폐렴이나 폐혈증으로 목숨을 잃을 수 있는 것처럼 우울증도 방치하면 자살과 같은 불행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에 적극적인 치료가 필요한 질환이다. 아무튼 건강한 생활습관과 긍정적 사고가 감기를 예방하듯이 자칫 심각한 질환이 될 수 있는 우울증도 긍정적 마음처럼 작은 노력으로 예방될 수 있음을 잘 기억해야 한다.

김형준 휴정신건강의학과의원 원장

※본 칼럼은 <전민일보>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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