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방영 시인/논설위원

‘가련다 떠나련다 어린 아들 손을 잡고/ 감자 심고 수수 심는 두메산골 내 고향에’ 이런 가사에 유년기 풍경이 떠오른다면, 시골 마을 향사에서 떠돌이 영화 상영꾼들이 보여주던 훅백 화면, 거기 빗줄기처럼 좍좍 선이 그어지고, 서글프게 노래가 흐르며 영화가 끝나던 밤일 것이다.
찾아보면 이 노래는 1959년 남홍일 감독의 영화 <유정천리>의 주제곡이다. 영화 줄거리는 가난한 택시 운전사가 사고를 내서 형무소에 가자, 그의 아내는 다른 남자와 떠나며, 형기를 마친 남자는 남겨진 어린 아들을 데리고 고향으로 가는 내용이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인생길은 몇 구비냐/ 유정천리 꽃이 피네 무정천리 눈이 오네’ 로 노래는 끝나는데, 당시 사람들에게는 비정한 도시의 삶은 ‘무정천리’, 냉혹한 현실에 상처 입은 사람을 치유해줄 공간은 ‘유정천리’였다. 내리는 눈은 시련을 겪는 험난한 과정을 말하고, 피는 꽃은 그런 와중에도 섞아는 아름다운 시간이다. 개인의 삶 뿐만 아니라 한 나라, 나아가면 인류의 길에도 그렇게 눈 내리고 꽃도 필 것이다.
자유당 정권 말기에 이 노래는 정치상황을 비꼬며 불리었다고 한다. 1960년 대통령 선거 한 달 전 민주당 후보 조병옥 박사가 미국에서 수술 받던 중 사망하자, 그를 지지하던 민중은 가사를 바꿔서 안타까움을 표현하고 정치현실도 꼬집었다. 거기 더해서 1956년 해공 신익희가 제3대 대통령선거 유세 기간 중 이리역 근처 호남선 열차에서 사망했던 사건과도 연결시키면서, ‘가도가도 끝이 없는 당선 길은 몇 구비냐 / 자유당에 꽃이 피고 민주당에 비가 오네’, ‘눈물어린 신문 들고 백성들이 울고 있네’로 불렀다는 것이다. 1960년 자유당정권의 3·15부정선거에 실망한 민중의 공감대를 표현하였기에 이 노래 작곡가와 불렀던 가수도 경찰 조사를 받았다고 한다.
개인의 현실 대처 방식은 주변에도 파장을 일으키며, 때로는 나라와 온 세계를 뒤흔들기도 한다. 셰익스피어 시절에도 세상을 ‘연결된 거대한 존재의 사슬’로 봤으며, 어느 한 고리가 떨어져 나가면, 전체 세계에 불균형과 혼란이 일어난다’고 여겼다. 한 예로 셰익스피어 비극 주인공 리어왕은 나라를 삼등분하여 세 딸들에게 주고 자신은 자유롭게 살기로 맘먹는다. 그러나 아첨에 속아서 간악한 두 딸에게만 나라를 넘기고 진실된 막내딸은 제외시킨다. 그 결과 나라는 전란에 휩싸이며, 스스로 영향력을 포기했던 리어왕은 막내딸마저 희생당하자 미쳐서 죽는다.
우리나라 역사에도 백성들을 전쟁과 고난에 빠뜨린 무능한 왕과 권력에 눈이 어두운 위정자들이 있어왔다. 이는 인류 역사에도 반복되며, 그릇된 지도자들의 결정은 혼란을 일으키며 대량학살과 전쟁 등 참극을 부른다. 히틀러나 모택동을 봐도 개인의 양심과 바른 판단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지금도 지구에서 전쟁은 진행 중인데 책임은 누가 지는가.
다양한 신념에 따라 사람들은 갖가지 물결을 일으키고, 인류는 그에 적응하거나 항거해 왔다. 유정천리를 찾아가는 이루어지지 않는 꿈은 인류 문명이 끝날 때까지 이어질 것이며, 그 누구도 어쩔 수 없이 그 길에는 반복하여 눈도 내리고 꽃도 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