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이다. 청룡이 우리 농촌에 여의주를 물어다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시작한 갑진년이 저물고 있다. 이맘때면 누구나 한해 동안 무슨 일을 했는지 돌아보게 된다. 열심히 일한 결과 좋은 성과를 얻고 행복한 사람도 있지만 아쉬움 속에 지난 세월을 한탄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올해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는 경사도 있었지만 뜬금없는 비상계엄 선포와 그 과정에서 드러난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불신과 반목, 패거리문화를 보면서 새삼 연초에 소개한 항용유회(亢龍有悔), 잘나갈 때 조심하지 않으면 후회한다는 글귀가 떠올랐다.
개인적으로 귀촌생활 8년을 보내면서 병원 방문횟수가 늘어났지만 그래도 고향에서 집사람과 함께 어머니 모시고 삼시세끼 하며 또 한해를 무사히 넘겼다. 농사는 해가 갈수록 어려운데 지난 가을 작약밭에서 풀을 베다 허리를 다쳐 계속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마음 하나 믿고 ‘농촌살리기현장네트워크’란 공부모임을 만들어 고령화와 기후변화 위기 속에서 지역의 농업과 농촌, 농협이 나아갈 길을 제시했지만 귀담아듣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농업분야에서는 쌀값 하락과 농산물 수급불안, 농자재값과 에너지요금 인상, 기상이변과 병해충 등 농가 경영에 대한 걱정이 많았다. 정부도 연초부터 농가소득과 경영안전망 구축과 식량안보 등을 핵심 과제로 선정, 과학적 수급관리와 수입안정보험 도입 등을 추진했지만 이렇다 할 성과를 얻지 못한 것으로 평가된다.
특히 물가안정을 위한 외국산 농산물의 무분별한 수입, 33㎡(10평) 농막 등 농지규제 완화, 양곡관리법 등 4개 법률개정안 거부 등을 지켜보면서 농업을 너무 경시한다거나 농정이 무너졌다고 한탄하는 소리도 들린다.
남는 쌀을 정부가 의무적으로 매입하는 것은 수급불균형과 자원 이용의 왜곡을 심화시키기 때문에 쌀 대신 수요가 많거나 부가가치가 높은 작물로 바꾸자고 유도하고 있다. 하지만 쌀농사에 익숙하고 판로가 안정적이기 때문에 다른 작물로 바꾸기가 쉽지 않다. 이를 촉진하려면 대체 작물에 대한 직불 대상과 지원 규모를 확대하고, 새 작물의 생산기반 정비와 시설·장비 및 판로 지원, 그리고 들녘경영체 육성 등 획기적인 대책이 필요하다.
다행히 18일 농림축산식품부는 기후변화와 고령화시대에 대응하기 위한 ‘농업·농촌 혁신전략’을 밝혔다. 즉 영세고령농 중심의 구조 개선과 소비자 수요에 기반한 쌀산업 개편, 지역 주도의 시·군별 통합 지원 등 농정의 패러다임을 전환하겠다는 것이다.
그렇다. 농업과 농촌을 살리기 위해서는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의 정부 효율부처럼 농업부문의 방대한 조직과 인력·예산을 가지고도 왜 식량자급률과 농업소득이 개선되지 않는지, 예산은 물론 각종 기금과 자조금이 어떻게 쓰이고 있으며 관련 조직은 제 역할을 하고 있는지 살펴봐야 한다. 또 달라진 여건 속에서 우리가 지향해야 할 새로운 농정의 목표와 우선순위, 정부의 역할, 그리고 정책대상과 추진체계를 혁신해 정책의 효율성을 높이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
지난 세월을 돌아보니 일은 많이 했으나 이룬 것이 별로 없다. 내년에는 더 큰 시련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희망을 갖고 용감하게 새해를 준비하자. 아픔도 부족도 미래를 향하면 삶의 새로운 힘이 되지 않던가. 그동안 어설픈 농부의 귀거래사를 읽어준 독자 여러분들에게 묵은세배를 드리며 올해 이루지 못한 소망이 새해에는 꼭 이뤄지길 빌어본다.
이동필 전 농림축산식품부 장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