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엄 선포와 박정희 동상

2024-12-26

얼마 전 대구 동대구역 광장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의 동상 제막식이 열렸다. 통상 그와 결부되는 이미지인 선글라스를 쓴 군인, 손을 힘차게 뻗는 국가 지도자의 모습이 아니었다. 동상이 담은 건 밀짚모자를 쓰고, 수확한 볏단을 들고 웃는 농민의 모습이었다. 과거 권위적 국가 지도자의 전범으로 호명되던 것과는 달리, 한국 산업화의 역사가 ‘먹고 살 걱정’을 덜어주는 과정이었음을 강조하는 비교적 담백한 접근이다. 이를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는 상징물로 선택된 게 볏단. 수백만 명의 국민을 보릿고개라 불리는 기아의 위기에서 구해낸 국산 벼 품종 통일벼다.

아쉽게도 통일벼는 문제가 많았다. 수확량이 늘어 배곯는 일이 줄긴 했지만, 주로 동남아 지역에서 많이 먹는 쌀 품종인 안남미(indica)와 교잡한 탓에 우리 입맛에 맞질 않았다. 게다가 한반도의 기후 조건과 잘 맞지 않아, 비료와 농약을 과거보다 많이 사용해야만 했다. 품종 자체로는 열악함이 많았다. 우리가 역사로서 기억해야 하는 건, 통일벼라는 품종 자체가 아닌 그의 임기 내 꾸준히 유지된 농공병진정책(農工竝進政策)이다. 농업협동조합(농협)의 역할을 확대해 농가 자본조달을 쉽게 만들고, 새마을운동으로 농업 기계화와 농지 정비를 수행했다. 그의 인권유린과 별개로 초기 한국 농업의 성취는 그에게 빚진 게 많다는 의미다.

개발도상국 시기의 한국이 그의 농업 정책 덕을 봤다지만, 최근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이 거부권을 행사한 양곡법 개정안에서 보듯 쌀은 이제 골칫거리다. 1995년까지만 해도 1인당 연간 양곡 소비량이 107㎏ 정도를 유지했지만, 2022년에는 그 소비량이 절반 정도인 57㎏로 뚝 떨어졌다. 그 빈자리를 채운 건 소·돼지·닭을 비롯한 3대 육류다. 한국육류유통수출협회의 소비 통계에 따르면, 2022년에 우리나라 사람들의 육류 소비량은 양곡 소비량을 뛰어넘었다. 집에서 치킨 뜯는 시대에 박정희 전 대통령이 이끈 한국 농업의 중흥은 이미 과거의 유산이 됐다는 의미다. 역설적이지만 그 덕분에 그는 광장에 남을 수도 있었다. 정치적으로 빛바랜 상징엔 해묵은 공과(功過) 논란이 붙을 여지가 적어서다. 그런데 윤석열 대통령의 느닷없는 계엄 선포가 이조차도 어렵게 만들었다.

고작 한 달 전까지만 해도 계엄이란 단어는 치킨이나 ‘오징어게임’보단, 통일벼나 쥐잡기운동에 가까운 사어(死語)였다. 그러니 산업화의 영광과 민주화의 성취를 두루 아우르는 새로운 보수를 말하는 게 가능했다. 하지만 낡은 군사정권의 용어가 살아나자, 박정희는 다시 군사독재의 상징으로 파묘됐다. 이젠 그의 성취는 기리자는 말조차, 퇴행적 계엄 시도를 옹호하는 반동이 됐다. 그 동상을 지키려 공무원에게 철야 감시까지 시켜야 하는 상황을 만든 이를 왜 보수가 감싸고 있나.

박한슬 약사·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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