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술패권 시대에서 선진국의 기술을 따라가기만 하는 전략으로는 과학기술 생태계의 다양성과 자율성을 저해해 생존을 담보하지 못하게 한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최종현학술원은 이 같은 내용을 담은 ‘기술패권 시대, 흔들리지 않는 과학기술 국가 전략’ 보고서를 발간했다고 8일 밝혔다.
이 보고서는 올해 4월 최종현학술원이 개최한 과학기술 정책 포럼의 논의를 토대로 최종현학술원 과학기술혁신위원회에서 집필한 과학기술 정책 제언서다. 염한웅 포항공대 물리학과 교수, 이상협 카이스트 생명화학공학과 특훈교수, 이정동 서울대 공학전문대학원 교수, 권오남 한국여성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회장, 정진호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원장, 현택환 서울대 화학생물공학부 석좌교수 등이 저자로 참여했다.
김유석 최종현학술원 대표는 “대통령직인수위원회 구성 없이 국정이 바로 시작되는 상황에서 과학기술과 같은 중장기 과제가 국민적 논의와 공감의 과정을 충분히 확보하기 어려울 수 있다”며 “이에 최종현학술원은 과학기술계를 대표하는 석학들과 함께 정파를 초월한 독립적 시각으로 과학기술 정책 보고서를 출간했다”고 말했다.
저자들은 우선 역대 정부가 공통적으로 채택해 온 선택과 집중 전략이 구시대적이며 혁신을 저해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한국은 지금까지 정부 주도의 전략 기술을 선정해 지원하는 전략을 펼쳐 왔는데, 기술과 시장의 변화가 극도로 빠르고 예측 불가능하게 전개되는 현실에서 특정 분야에 대한 집중 투자는 고위험의 도박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자들은 선진국에서 먼저 정립된 기술을 추격하는 ‘패스트 팔로워’ 전략이 오히려 생태계의 다양성과 자율성을 저해해 장기적 혁신 역량을 약화시키고 있다고 주장했다. 염 교수는 “젊은 연구자들이 정부가 지정한 분야 외 주제를 선택할 경우 연구비 확보가 어려워지고 모험적이고 창의적인 시도가 위축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며 “정부 중심의 일방적인 전략 설정에서 벗어나 민간의 다양성과 창의성을 살리는 방향으로 정책 전환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이정동 서울대 교수 역시 “중국은 추격자를 넘어 많은 분야에서 새로운 기술의 로드맵을 선도하는 역량을 빠르게 키워 나가고 있다”며 “이러한 현실에서 한국은 남을 뒤쫓기만 해서는 생존하기 어려우며 독창적 원천기술을 제시하지 못하면 글로벌 가치사슬에서 언제든 대체될 수 있다”고 말했다.
보고서는 정권 교체 때마다 반복되는 정책 단절과 방향 전환으로 한국 과학기술 정책의 지속 가능성과 효율성이 훼손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이전 정부에서 추진하던 대형 국가연구사업이 축소되거나 폐지되고 새 정부가 추진하는 새로운 사업이 우선시되는 현상이 반복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저자들은 △정권을 초월한 과학기술 전략의 수립 △장기 계획과 단기 전략 간의 균형 △민간과 학계의 창의적인 시도를 촉진할 수 있는 독립적인 연구 생태계 조성이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염 교수는 “과학기술 강국들의 공통점은 기초가 탄탄하다는 것”이라며 “인공지능(AI), 바이오, 반도체 등 전략 기술에서 세계 최고가 되기 위해서는 수학·물리·화학·생물학 등 기초과학과 원천기술의 튼튼한 기반이 필수”라고 짚었다.
보고서는 기술주권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대체불가역량을 기르는 것이 필수라고 했다. 한국이 유일하게 만들 수 있거나 한국의 기술이 아니면 대체할 수 없는 분야를 확대하는 것이 기술주권 전략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이정동 교수는 “기술주권 이슈는 과학기술을 넘어 외교·안보·산업·인재 정책이 얽힌 복합 영역”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대통령 직속 ‘기술주권 워룸’을 만들어 부처간 정보를 통합하고 실시간 대응체계를 갖춰야 한다”며 “워룸 체제가 구축되면 국가 차원의 기술 감시, 외교 연계, 산업 대응, 연구개발 방향 설정 등이 유기적으로 작동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저자들은 인재 확보 전략의 대전환도 필요한 시기라고 짚었다. 비자 제도 개편, 연구환경 개선, 가족 정착 지원 등 종합적 인재정책으로 국내외 인재 모두가 한국을 연구와 삶의 터전으로 삼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상엽 교수는 “중국처럼 과학기술인이 국가 전략의 중심에 서고 실질적인 예우를 받는 시스템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며 “청년들이 ‘나도 과학기술인이 되고 싶다’고 말할 수 있는 사회가 돼야 하며 존중받고 보람 있는 커리어로서의 과학기술 직업이 자리 잡을 때 인재 유입과 지속적인 성장의 선순환이 가능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