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은 내년 초 CBDC 실효성 검증
보호 우선 시스템 구축 입장에도
거래 공개→정부 통제 우려까지
“금융거래가 투명하게 공개되면서 개인의 프라이버시가 실종되고, 각국 정부는 개인의 경제 활동을 감시하고 통제할 수 있는 사회가 도래할 수 있다.”
한국은행이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 도입을 위해 진행하는 10만명 규모의 테스트를 앞두고 갑론을박이 계속되고 있다. 한은은 개인정보 보호를 최우선으로 시스템을 구축한다는 입장이지만 이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는 좀처럼 누그러지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더 나아가 일각에서는 금융시장에서 CBDC가 개인을 감시하는 이른바 빅브라더의 매개가 될 수 있다는 불안 섞인 여론까지 나온다.
5일 금융권에 따르면 한은은 내년 초 10만명을 대상으로 CBDC 테스트를 시행한다. 이 테스트는 CBDC가 실제 일상생활에서 활용될 수 있는 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한은은 이번 실험을 통해 보조금·상품권·이용권 등 바우처를 블록체인 기반 토큰으로 대체할 수 있는지 검증할 예정이다.
한은과 금융위원회, 금융감독원 등 CBDC 테스트를 추진 중인 관계부처는 조만간 이와 관련된 금융 규제 샌드박스 심사를 마치고 참가 은행을 발표할 예정이다. 현재까지 KB국민·신한·우리·NH농협·기업은행 등 주요 은행은 모두 참여 의사를 밝힌 것으로 확인됐다.
소비자들은 자신의 예금을 토큰으로 전환해 테스트에 참여하는 가맹점에서 사용할 수 있다. 관계기관은 테스트 과정에서 분산원장 기록과 은행의 장부 기록을 실시간으로 연계해 지급결제의 법적 효과를 안정적으로 보호한다는 방침이다.
CBDC는 중앙은행이 발행하는 디지털 화폐를 뜻한다. 현금 이용이 매년 줄어들고, 2010년 중반부터 블록체인 기술이 접목된 암호화폐가 주목받기 시작하면서 공공 기반 디지털 화폐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이에 따라 현금보다 발행비용이 적게 들고 사용의 편리성, 투명성 등을 제고할 수 있어 한국을 포함한 주요국들이 활발하게 연구 중이다. 우리나라는 한은을 중심으로 2020년부터 본격적인 연구와 실험을 시작했다.
문제는 CBDC를 둘러싼 개인정보 유출 우려가 해소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안전성 확보와 개인정보보호 이슈, 디지털화폐 거래시 처리 속도 등은 대표적인 과제로 꼽히고 있다. 뿐만 아니라 ▲CBDC 개인정보 해당 여부 ▲개인정보처리자 이슈 ▲분산원장 이슈 ▲정보주체의 권리 ▲개인정보 국외이전 등 제도적 기반 마련도 필요한 상황이다.
학계의 일부 전문가들도 CBDC 발행의 필요성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이들은 소매·범용 CBDC 발행의 부정적 영향으로 CBDC가 사용자의 프라이버시를 고려해 설계된다고 해도 익명성이 보장된 현금거래와 동일한 수준의 프라이버시를 보장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한은은 개인정보위와 협력해 CBDC 도입시 시스템 내 개인정보가 개인정보보호법에 따라 안전하게 처리될 수 있도록 기술 및 정책 측면에서의 검토를 이어간다는 계획이다. 또 관련 부처 및 전문가들과의 협력을 통해 개인정보보호를 강화할 수 있는 기술적 연구 등을 지속할 예정이다.
다만 아직 주요 국가가 CBDC와 관련해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는 만큼 정식 도입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으로 전망된다.
또 미국 대선 결과도 새로운 변수로 떠오르고 있다. 오는 5일(현지 시각) 치러지는 미국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당선될 경우 CBDC 도입은 지연되거나 무산될 가능성이 커질수 있기 때문이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지난 2월 폭스뉴스와 인터뷰에서 “CBDC는 개인의 자유로운 금융 거래와 경제 활동을 정부가 감시하고 통제하는 수단에 불과하다”고 지적한 바 있다.
다만 한은이 하드 프라이버시 성향으로 CBDC를 개발할 것이라는 의견도 나온다. 하드 프라이버시의 경우 한은이 CBDC를 개발할 때 기관 통신에 대한 가상망과 일반금융소비자 개인정보를 암호화함으로써 참가기관이라도 거래내역을 함부로 열람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한은도 지난 9월 세미나를 통해 CBDC 설계와 관련한 한은의 연구 방향과 개인정보 보호 중심 설계 원칙을 적용한 CBDC 시스템 구축의 중요성을 강조한 바 있다.
한은은 또 세계 최초로 익명 거래가 가능한 오프라인 CBDC 시제품을 개발했으며, 온라인 CBDC에서도 개인정보 보호를 강화한 익명 거래 시스템을 성공적으로 실험했다고 밝혔다. 이밖에 영지식 증명, 동형 암호, 링 시그니처 등 첨단 기술을 도입해 익명성을 유지하면서도 거래의 유효성을 검증하는 다양한 CBDC 실험을 진행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한은 관계자는 “한은은 다양한 기술을 통해 개인정보 보호와 거래 안전성을 동시에 확보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창용 한은 총재 역시 CBDC 도입에 대한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 총재는 2일(현지시간) 조지아 트빌리시에서 '핀테크 산업 발전을 위한 협력'을 주제로 열린 조지아 중앙은행 주최 아시아개발은행 세미나에 참석해 “경제의 디지털화는 피할 수 없는 흐름”이라며 “중앙은행도 앉아서 기다리기보다는 민간과 경쟁하며 새로운 디지털 환경에 대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