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의 독립운동가-임천택, 서병학, 박창운

2024-10-07

1905년 1,018명의 한인들이 멕시코의 남부 살리나 크루스(Salina Cruz) 항구에 첫발을 디뎠다. 한국 역사상 최초로 멕시코 이민이 시작된 것이다.

멕시코에 간 한인은 대부분 본국에서의 절망 때문에 정든 고향을 등지고 새로운 희망을 찾아왔던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20대 초반의 젊고 활기찬 사람들이다.

멕시코에 도착한 한인의 눈 앞에는 듣지도 보지도 못하던 일이 매일 벌어졌다. 특히 이들에게 에네껜 농장에서 4년간의 갖은 고역이 기다리고 있었다.

멕시코 한인들의 고통은 1909년 5월 농장에서 풀려나면서 해방됐다. 이후 멕시코 한인들은 국민회 메리다(Merida) 지방회를 조직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옹호하고 민족적 정체성을 지켜갔다.

어려운 경제 상황에도 불구하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쏟았다. 멕시코 한인의 이민사는 해외 한인 독립운동의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이민 역사 속에서 임천택, 서병학, 박창운은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들이다.

멕시코 한인 사회는 경제적 절망 속에서 시작되었고, 이들은 주로 20대의 젊은이들로 구성되었다. 초기 이민자들은 멕시코에서 힘든 노동에 시달리다가 1909년에 농장에서 해방되며, 독립운동을 위한 민족 정체성을 찾기 시작했다. 이민자는 이후 쿠바로 재이민하여 새로운 사회를 형성하게 된다.

임천택은 1903년에 태어나 멕시코에서 쿠바로 이주했다. 그는 국민회 지방회 활동과 교육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독립을 위해 노력했고, 여러 단체에서의 활동을 통해 한인 사회의 민족 의식을 고취시켰다.

또한 서병학은 1885년에 태어나, 멕시코에서 노동을 한 후 쿠바로 이주했다. 그는 국민회의 다양한 역할을 맡으며 독립을 위해 헌신하였고, 그의 활동은 한인 사회의 단결과 민족 의식 고취에 크게 기여했다.

마지막으로 박창운은 1889년에 태어나 멕시코에서 노동한 후 쿠바로 이주하였다. 그는 국민회에서의 활동을 통해 한인들의 권익을 옹호하고, 독립을 위한 활동을 지속했다. 그의 노력은 한인 사회의 단결과 민족 정체성 유지에 큰 영향을 미쳤다.

멕시코와 쿠바의 한인들은 빼앗긴 조국을 찾기 위해 대한인국민회 지방회를 조직했으며,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대한인국민회는 ‘무형의 한족정부(韓族政府)’라 불릴 만큼 1910년대 독립운동의 최고 기관이었다.

1910년대 미주 지역에서 국민회는 한인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정부 역할을 맡았다. 독립운동의 지도 기관을 자임했다.

대한인국민회 지부가 멕시코에는 1909년, 쿠바에는 1921년 설립되어 한인의 이익을 옹호하고 독립운동을 지도하는 기관으로 역할을 다하였다.

멕시코에 이민 온 세 사람은 어려운 경제 상황 속에서도 대한인국민회와 조국의 독립운동을 위하여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힘을 쏟았다.

이들은 멕시코 지방회에서는 한 사람당 1페소의 월 연금을 거리낌 없이 정기적으로 납부했다. 대한인국민회 총회에 의무금·가옥채·기계채 등의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국민회에 필요한 각종 특별의연을 모집하고, 동맹 저축, 애국 동맹금을 거둘 때 기꺼이 돈을 냈다. 1919년 1월에는 파리강화회의 대표자 파견을 위해 특별의연으로 1인당 20페소 이상을 거두었다.

3.1 운동 기간에는 메리다 지방회 소속의 한인들이 1919년 12월 1일까지 중앙 총회에 보낸 돈이 약 1,000달러가 넘었다.

메리다 지방회 설립 직후 일어난 멕시코 혁명의 영향으로 한인들은 삶의 터전을 옮겨야 했다. 이 기간 멕시코 한인 사회에는 인구 이동이 급격하게 이루어졌다. 한인들은 심각한 생활난과 경제적 상승을 위해 끊임없이 옮겨 다녔다. 그 가운데는 경제적 상황이 훨씬 좋은 미국으로 간 사람도 있었고, 1921년에는 쿠바로 집단 이민을 떠나기도 하였다.

임천택, 서병학, 박창운은 멕시코에서 쿠바로 이민 간 대표적인 지도자들이었다.

경제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멕시코와 쿠바 지역 한인들은 대한인국민회를 중심으로 상호 단결을 통하여 한인들의 이익을 옹호하고, 민족적 정체성을 지키는데 최선을 다했다. 경제 상황이 좋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모든 노력을 쏟았다.

세 사람은 멕시코와 쿠바 한인들을 국민회를 중심으로 단결시켰다. 한인 사회를 안정시키는데 지도력을 발휘했다. 나아가 독립운동을 일생에 거쳐 적극 후원한 점이 높게 평가된다. 숭무학교를 설립하여 군인을 양성하여 원동 지역의 독립군으로 보낼 계획을 추진하였다는 사실은 무장투쟁 분야 독립운동의 측면에서도 의미가 깊다.

결국, 임천택, 서병학, 박창운은 멕시코와 쿠바의 한인 사회를 단결시키고 독립운동에 기여한 지도자들로서, 그들의 노력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의미 있는 역사적 기억으로 남아 있다. 이들의 헌신은 이후 세대의 한인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치며, 독립운동의 중요성을 각인시키는 데 기여했다.

전북동부보훈지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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