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 패권경쟁 시대의 무기, 특허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대통령직 복귀에 가장 긴장하는 나라가 중국이다. 미국이 중국을 견제하고 압박하는 배경에는 바로 중국 기업들이 미국의 특허를 무단 사용하고 있다는 논리가 깔려있다. 트럼프 1기에 미국이 중국의 화웨이를 제재하면서 가장 먼저 내세운 이유가 특허 도용이었다. 트럼프 2기에도 마찬가지 논리가 적용될 것이다.
미국으로서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1980년대 일본의 위세는 대단했다. 소니와 토요타 등 일본 기업들이 세계 시장을 휩쓸기 시작했다.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미국 산업을 재건할 방안이 필요했다. 당시 휼렛패커드(HP) 회장인 존 영을 위원장으로 하는 특별위원회를 구성했다. 이 위원회가 1985년에 제출한 보고서의 핵심은 ‘강한 특허 정책’이었다. 원천기술이 약한 일본을 견제하고 미국의 혁신을 활성화한다는 전략이었다.
미국 특허 도용으로 화웨이 제재했던 트럼프 복귀에 중국 초긴장
치열한 기술 패권 경쟁 시대…국가 간 전쟁의 무기는 지식재산권
한국은 국제특허 출원 실적 세계 5위지만 사업화 실적 매우 저조
특허 담당 법관 근무기간 늘리고 지식재산 사건은 한 곳에 집중을
미국이 일본 경제를 주저앉힌 이유가 1985년 플라자 합의라고 말한다. 달러 가치를 절하시켜 미국의 무역 경쟁력을 강화한 합의다. 그런데 왜 일본은 이 불리한 합의에 서명했을까? 미국의 특허라는 무기를 빼고는 설명이 안 된다.
후발주자 견제에 지식재산권 활용
지식재산권에는 특허·디자인·상표·저작권·영업비밀 등이 포함된다. 특허 외에 디자인과 상표도 매우 중요한 산업 재산권이다. 소비자가 물건을 살 때 제품의 디자인과 상표를 보고 사는 경우가 많다. 저작권은 책이나 영화·음악에 담긴 콘텐트를 보호하기 위한 제도다. 컴퓨터 소프트웨어도 저작권 보호를 받는다.
21세기 글로벌 기술 패권경쟁 시대가 되면서 세계는 지식재산 전쟁이 됐다. 기초기술이 앞선 기업은 후발주자의 추격을 견제하는 데 지식재산권을 이용한다. 2011년 미국의 애플이 삼성전자를 상대로 특허 소송을 전개했다. 애플은 삼성전자가 애플 폰의 디자인을 모방해 제품을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두 회사의 제품이 비슷하게 생겨 소비자가 혼동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 다툼은 2016년까지 이어져서 결국 삼성전자는 엄청난 배상금을 지급하고 타협한 것으로 알려졌다.
허울뿐인 세계 5대 특허 강국
한국의 지식재산 보호는 1977년 특허청을 설립하면서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그 후 1998년 특허법원을 설립하고 2011년 지식재산기본법을 시행하면서 본격적인 틀을 갖췄다. 이 법에 따라 대통령 직속 국가지식재산위원회를 설치하고, 국무총리와 민간위원이 공동위원장을 맡게 됐다. 국가지식재산위원회는 국가의 지식재산 콘트롤타워로서 5년마다 지식재산 총괄계획을 발표한다.
한국의 지식재산은 그동안 많이 발전해 특허출원으로 보면 세계 4위, 국제특허(PCT) 출원은 5위로 세계 5대 특허 강국(IP5) 안에 들게 됐다. 그러나 특허의 사업화 실적은 매우 좋지 않다. 실제로 돈을 만들어 주는 특허는 매우 적다. 외국에 지불하는 특허료가 많아 특허 무역수지도 매년 적자다. 그나마 다행은 저작권이 크게 발전해 저작권 수출이 지난해 기준 22억 달러의 성과를 올렸다. 세계를 휩쓸고 있는 K팝이나 영화 등 한류 콘텐트의 힘이다.
부끄러운 특허 보호 수준
왜 특허에서 월등하게 사업화 실적이 나쁠까? 특허 숫자만 많지 제대로 보호되지 않아 사업화까지 가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특허 보호 수준은 정말 부끄러운 수준이다. 스위스 국제경영개발대학원(IMD)이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지난해 기준 64개 국가 중 한국은 28위다.
여기에는 크게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부실 특허가 많기 때문이다. 지난해 기준 우리나라의 특허 무효율은 48.2%로, 미국(25.6%)이나 일본(13.9%)보다 월등히 높은 수치를 나타냈다. 이것은 어떤 사람이 시비를 걸면 거의 절반이 무효화 된다는 말이다. 내용이 허술한 것을 특허로 등록해줘 생긴 일이다.
둘째는 특허 소송에 너무 긴 시간이 걸려 제대로 보호받지 못하고 있다. 1심을 담당하는 지방법원의 특허 소송 기간은 평균 19.4개월(2018~2021년), 2심인 특허법원은 평균 10.6개월(2019~2022년)이다. 결국 2심까지 심판을 받으려면 평균 2.5년 정도 기다려야 한다. 이렇게 오랫동안 시간과 변호사비를 투입하기란 개인이나 중소기업에 매우 어려운 일이다.
셋째는 특허 침해에 대한 배상액이 턱없이 낮다는 점에 있다. 한국의 배상액 중간값은 1억원 이하다. 이에 반해 미국의 배상액 중간값은 약 65.7억원이다. 물론 미국의 시장이 크기 때문에 배상액 기준이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의 배상액은 지나치게 작아 예방 효과가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즉, 특허를 일단 침해하고 걸리면 나중에 배상해도 이익이 된다는 말이다.
한국 기업의 한국 법원 패싱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일부에서는 특허 무용론이 제기되기도 한다. 이러한 현상을 반영하듯 현재 특허법원의 소송 건수는 매년 감소하고 있다. 2011년 1216건이던 것이 지난해 639건으로 감소했다. 세상은 복잡해지고 특허는 늘어나는데 소송이 이처럼 급속히 감소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 법원에 기대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는 판단으로 특허권자가 포기하는 것이 아닐까 짐작한다.
더욱 놀라운 일은 한국 회사끼리 특허 사건도 외국에 가서 해결하려 한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로 2019년 LG에너지솔루션과 SK이노베이션의 소송, 2023년 메디톡스와 휴젠의 소송이 꼽힌다. 이와 같은 한국 회사들의 한국 법원 패싱은 매우 뼈아픈 현상이라 할 수 있다.
국제 특허소송에는 포럼 쇼핑(Forum Shopping)이란 말이 있다. 소비자가 법원을 쇼핑하듯이 고른다는 말이다. 여기서 소비자는 특허를 침해받은 특허권자다. 특허는 속지주의가 적용된다. 특허는 특허가 출원된 나라 안에서만 보호받는다. 따라서 특허 소송은 국가별로 제기해야 한다. 하지만 모든 나라에 소송을 제기하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래서 대표적인 국가의 법원에서 판단을 받아 그 결과를 다른 나라 법원이 참고해 판단할 수 있게 한다.
이때 특허권자가 법원을 쇼핑하듯이 법원을 선택하게 된다. 이때 선택 기준은 특허권자에게 얼마나 유리하게 판단해주는가, 얼마나 빨리 판단해 주는가 등이다. 현재 전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법원은 미국의 텍사스 동부법원이다. 한국의 법원은 외국 회사들이 찾아오기는커녕 한국 회사까지 무시하는 법원이 되고 말았다.
특허 심사 품질 개선해야
한국의 특허제도가 인정받기 위해서는 다음 세 가지가 필요하다. 첫째 특허 무효율을 낮추는 노력을 해야 한다. 무효율이 높다는 말은 부실 특허가 많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심사가 부실하다는 뜻이다. 한 걸음 더 들어가 보면 특허심사관의 과중한 업무량과 직결돼 있다. 한국 심사관 1인당 연간 심사 처리 건수는 지난해 기준 186건이다. 이는 유럽(63건)·미국(67건)의 약 세 배에 해당하는 수치다. 특허심사관을 대폭 늘려 심사 품질을 개선해야 한다. 그리고 한번 등록해준 특허는 최대한 보호하려 노력해야 한다.
둘째는 특허 담당 법관의 전문성을 제고해야 한다. 궁극적으로 법관의 전문성이 높으면 많은 것이 해결된다. 판단도 빠르고 올바르게 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법관의 실력이 충분히 늘어날 수 있도록 특허 사건을 오래 담당해야 한다. 한국은 2~3년이면 순환 발령이 난다. 미국과 독일의 특허 판사는 10년 이상 근무한다. 5년 이상 근무하는 가사·소년·의료 분야처럼 특허에도 전문법관 제도가 필요한 이유다.
셋째는 법원의 관할 집중이 돼야 한다. 지식재산의 관련 사건을 한곳에 모아서 판단하는 것이 효율적이다. 현재는 특허·상표·디자인의 민사 소송은 특허법원으로 관할이 집중돼 있다. 여기에 영업비밀·부정경쟁·가처분·형사사건 등도 집중시키는 것이 좋다. 하나의 사건이 특허와 영업비밀·가처분·형사 문제와 연관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지식재산은 국가의 무형 자산이다. 자산을 만들기 위해 아무리 노력해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면 헛고생이다. 치열해지는 기술패권 시대에 국가 간 전쟁은 지식재산을 무기로 싸운다.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무기를 제대로 손질하고 보호해야 한다.
이광형 KAIST 총장, 국가지식재산위원회 공동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