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얼빈’ 안중근, 우리의 예상을 빗나가야 했던 이유 [홍종선의 명장면㉕]

2024-12-25

입력 2024.12.26 07:10 수정 2024.12.26 07:21 홍종선 대중문화전문기자 (dunastar@dailian.co.kr)

시작이 반이다. 서점에 서서 책의 첫 페이지만 읽어도 계속 읽고 싶은 책인지, 내 취향에 맞는 책인지, 어느 정도의 완성도를 지녔을지 갈피를 잡을 수 있다. 영화도 그렇다.

영화 ‘하얼빈’(감독 우민호, 제작 ㈜하이브미디어코프, 배급 CJ ENM)은 상영 시작 10분 만에 만족도에 관한 판가름이 선다.

1908년 함경북도 신아산에서 모리 소좌가 이끄는 일본 부대를 기습 공격하는 안중근 대한의군 참모중장의 군대. 숫자는 절반이요 열등한 무기들에 화력은 택도 없지만, 나라의 주권을 되찾아 독립 국가를 이루겠다는 충의와 절박함이 모든 부족을 메워 돌격을 가능케 한다.

‘하얼빈’이 단지 300억 원 들인 액션영화였다면, 우리도 이제 독립군과 그들의 전쟁을 좀 ‘폼 나게’ 그릴 때도 되지 않았어? 라고 생각하고 출발한 영화였다면, 공포의 외인구단 같은 대한의군의 활약을 쾌감 넘치는 액션으로 펼쳐냈을 것이다.

하지만 우민호 감독은 영화의 시작을 장식하는 첫 전투에서 ‘하얼빈’의 정체성을 명확히 보여준다. 전투는 기세라며, 기세 좋게 밀어붙여 분명 승전고를 울리지만, 승리가 그저 승리만이 아니다. 폭약 투척과 사격은 전쟁의 시작일 뿐, 결국은 몸과 몸을 맞댄 백병전(칼이나 창, 총검 따위와 같은 무기를 가지고 적과 직접 몸으로 맞붙어서 싸우는 전투)이 필연이다.

군계일학의 검술로 적을 제압해 가던 안중근(현빈 분)과 이창섭(이동욱 분)과 우덕순(박정민 분)은 어느새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진흙을 뒤집어쓴 ‘흑수광부’(검은 머리 풀어 헤친 미친 사내)가 되어 있고 짧은 머리에 안경 쓴 학자 같은 얼굴의 김상현(조우진 분)도 일당백 전사이고, 흑색 흙칠을 하고 뒤엉켜 싸우니 적군과 아군의 구분도 어렵고, 진 쪽은 물론이고 이긴 쪽의 병사들도 ‘사람이 사람을 죽여야 하는’ 참혹한 전쟁에 넋이 나가 침을 흘리고 허공에 칼을 휘젓는다. 눈앞을 맴도는 명장면이다.

다른 나라의 주권을 함부로 유린하고도 오만방자한 태도를 보이는 일본 황군, 그들을 멋지게 처단하고 기백을 떨치는 독립군, 이렇게 이분법으로 표현했다면 메시지도 쉽고 쾌감도 컸겠으나 우민호 감독은 다른 이가 갔던 길을 거부하고 새 길을 냈다. 평화롭게 살던 범부(평범한 사람)였고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이 없었다면 순하게 살았을 한민족이 잔인한 전장에 내몰린 현실, 나아가 나라를 빼앗긴 민족이 처해야 했던 두렵고도 위태했던 국운을 아비규환의 ‘지옥’으로 표현했다.

사람으로 살고 싶어도 살기 위해선 의기로 미쳐야 했던, ‘과연 내가 116년 전 저 현장에 있었다면…’ 상상만으로도 몸서리치는 두려움을 안긴다. 눈을 질끈 감으면서도 지금 내가 발 딛고 있는 이 땅을, 역사의 존속을 누가 구했고 누가 지켰는지 명확히 깨닫는다. 바로 나와 똑같이 죽을까 두렵고 ‘죽지 않고 살고 싶었을’ 평범한 우리다.

목숨이 9개인 것도 아니면서 사람이기에 단 하나뿐임에 분명한 생명을 걸고, 먼저 간 동지의 목숨을 이어 산다는 엄중한 책임감으로 두려움을 가까스로 떨쳤을 독립군들을 생각하며 눈의 초점을 잡아 정신을 차리고 영화 ‘하얼빈’의 남은 100분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관객 자신의 의지로 ‘하얼빈’ 호에 탑승하고도, 의도적으로 단순화한 촬영 각도와 조명 심지어 색채를 뺀 일부 화면을 통해 영화가 지향하는 장르가 화려한 액션이 아님을 인지하고도, ‘다시’ 낯설 수 있다. 우민호 감독이 배우 현빈의 심신을 빌려 그려낸 안중근은 언뜻 ‘영웅’의 모습이 아니다. 한 치의 흔들림 없이 결단력 있고, 속전속결 단호한 리더십을 발휘하지 않는다.

주변을 폭넓게 살피고 사람이 우선이다. 일본군을 다 죽이는 게 목표가 아니라 대한의 주권을 되찾는 게 목적이다. 전투의 승리로 사로잡은 일본군도 만국공법에 따라 ‘포로 대우’를 하려 하고, 내부 배신자에게도 두려움에 방황할 기회와 스스로 잘못을 만회할 기회를 준다.

핏빛 전장, 내 코가 석 자인 정도가 아니라 나라를 빼앗긴 절체절명의 상황에서도 잃지 않는 ‘고결한 대의’는 자칫 우유부단함으로 오판의 우를 범하는 리더로 비칠 수도 있다. 우리가 원하는 안중근의 모습이 아니라고? 무엇이 역사적 진실에 가까운가는 따져 묻지 않겠다. 어째서 안중근의 인본주의, 안중근의 세계사적 대의에 주목했는가가 중요하다.

우민호 감독이 그려낸 안중근은 단지 일본제국의 전 총리이자 제1대 조선통감 이등박문(이토 히로부미)을 암살한, 거사에 성공한 독립전쟁의 영웅이 아니다. 1909년 10월 26일 하나의 역사적 사건을 일으킨 주인공이 아니라 안중근이 어떠한 마음으로 당시로서는 끝이 보이지 않는 지난한 독립전쟁에 임했는지, 일부 독립군조차 ‘과연 독립의 그날은 올까, 내 목숨 부지해 가족을 위하는 게 낫지 않은가’ 번민할 때 이 모든 갈등과 실수의 과정을 끌어안고 어떠한 태도로 정진해 나아갔는지를 보여준다. 왜? 거기에 의사 안중근의 진정한 위대함이 있기 때문이다.

쉽지 않은 길을 택한 우민호 감독, 이를 지지해 출연하고 제작하고 투자하고 배급하는 모든 이들. 영화를 보노라면 이들 역시 ‘하얼빈’을 세상에 내놓기 위해 또 다른 의미의 전장에 나섰음이 전해온다.

300억 원을 어디에 썼느냐는 반응, 촌각을 다투는 상황에서 폭약을 구하러 가는 길이 왜 그리 멀어야 했는지 영상미가 그토록 빛나야 했는지를 묻는 소리, 예상했을 것이다.

한 명의 관객으로서, 적어도 한 가지는 알겠다. 진정 우여곡절 끝에, 어렵사리 구한 그 귀하디귀한 폭약이 단방에 날아갈 때의 그 허망함과 분노는 폭발적이다. 퇴로를 마련하지 않고, 살기를 포기하고 죽기를 각오해 적의 심장 앞으로 “대한 독립 만세” 걸어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영화는 매 순간 아름다우면 최상이고, 적어도 마음 적시는 오아시스를 두엇은 품고 있어야 예술이다. 절정 직전의 고요, 기막힌 대비다.

영화 ‘하얼빈’은 개봉 이틀만에 125만 명을 돌파했다. 손익분기점 680만 명을 넘는 일은 관객만이 함께한 이들에게 줄 수 있는 기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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