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기원전 4004년 10월 22일 오후.’ 1650년 무렵 제임스 어셔 영국 국교회 대주교(1581~1656)가 계산한 천지창조일이다.
성경의 인물들을 토대로 역산을 이어가던 어셔는 ‘천지창조일=기원전 4004년 10월 23일의 전날 밤(22일 오후 6시)’이라고 콕 찍었다. 이후 유럽인들은 이 날짜를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한 날’이라 굳게 믿었다.
②1856년 독일 뒤셀도르프 인근의 네안더 골짜기 석회암 동굴에서 괴상한 화석이 다수 발견됐다. 엉덩이뼈와 눈 윗부분이 툭 튀어나온 ‘돌출이마’는 ‘사람 같은데 사람 같지 않은 사람들의 뼈’(훗날 네안데르탈인으로 명명) 였다. 3년 뒤인 1859년 찰스 다윈(1809~1882)이 <종의 기원>에서 진화론을 펼친다. ‘창조론자’들은 “맙소사! 우리가 원숭이의 후손이었다는 말이냐”고 외쳤다.
■원숭이 혹은 인간?
③1891년 인도네시아 자바섬의 솔로강변 트리닐 섬에서 흥미로운 뼈무더기가 발견된다. 원숭이와 인간의 중간 정도 쯤 되는 동물의 두개골과 아래턱뼈, 이빨3개, 대퇴골 하나를 찾아낸 것이다. 조립해보니 두 발로 서서 걸었음이 확실해졌다. 다윈의 진화론 과정 중 ‘잃어버린 고리(Missing link)’, 즉 원숭이~인간을 이어주는 고리를 찾은 것이다. 이 화석에 ‘자바 직립 원인(Pithecanthropus erectus)’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직립(直立·곧추 선) 원인(猿人·원숭이와 인간의 중간)’이라는 뜻이었다.
④1920년대 중국 베이징(北京) 인근의 저우커우뎬(周口店)에서 범상치않은 뼈화석이 속속 출토된다. 고인류의 치아(1921), 오른쪽 아래 어금니(1927)에 이어 소녀 및 성인 남자의 아래턱뼈(1928)가 잇달아 나왔다. 이들 화석에 ‘베이징 원인(Sinanthropus pekinensis, 현재 Homo erectus pekinesis)’의 명칭이 붙었다. 1929년 12월에는 단단한 모래 흙에 묻혀있던 고인류의 두개골까지 확인됐다. 학계는 이 두개골의 50만 년 전이라 판단했다.
■코뿔소 뼈의 출현
이렇게 고인류의 출현 소식이 동으로, 동으로 한반도 근처인 베이징까지 밀려 들어왔다. 한반도 진입이 시간문제로 보였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등은 베이징에서 들려온 고인류의 두개골 발견 소식을 전하면서 ‘구석기 문화’를 언급하기 시작했다.
베이징에서 구석기인들의 두개골까지 확인되었다면 어떤가. 한반도에도 구석기인들이 살지 않았을까.
1932년 7월 두만강 연안인 함경북도 종성 동관진의 연대봉 대지에서 심상치않은 보고가 접수됐다.
“철도공사로 잘린 상삼봉 주변에서 이상한 뼈가 발견된다”는 것이었다. 현장을 답사한 모리 다메조(森爲三) 도쿄대(東京大) 교수가 들소뼈와 코뿔소뼈를 수습했다. 한반도에서 홍적세(250만년전~1만년전) 출토 첫 유물 관련 보고라 할 수 있다.
2년 뒤인 1935년 7월 24일 도쿠나가 시게야쓰(德永重康) 와세다대(早稻田大) 교수 주도로 동관진 유적을 정식 발굴했다.
그 결과 ‘흑요석을 가공한 석기 2점’ 등을 찾아냈다. 이 동관진 유적 발굴조사 내용은 1940년 논문(‘조선 동관진 발굴 구석기 시대의 유물’)으로 학계에 발표된다. 이것이 한반도 구석기 시대를 다룬 첫 논문이다.
■문산에서 구입한 부싯돌은?
그 즈음 경기 문산에서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은’ 유물 채집 및 구입 행위가 벌어진다. 요코야마 쇼자부로(橫山將三郞) 경성제대 교수가 그 주인공이다. 그가 1935년 9월 문산의 구릉 및 시장에서 채집·구입한 유물을 설명한 기록이 남아있다.
“문산의 뒷골목 거리 잡화점 가게 앞에 석기가 진열…그것은 구릉에서 발견한 뗀석기와 같은 것이었다…몇 점 구입했더니 가게 주인이 철조각을 들고 나와…‘이것이 없으면 불을 붙이지 못하니 사라’고 권유했다…이 석기가 부싯돌로 쓰이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요코야마는 문산에서 채집·구입한 유물이 구석기인줄 알지 못했다. “최근 제작된 부싯돌용 도구”라는 결론을 내린다. 그가 채집한 유물 중 일부가 ‘요코야마(橫山) 자료’라는 이름으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이 되었다.
유물에 적힌 기록대로라면 구석기로 추정되는 12점이 문산·파주 지역(문산 8점·백련산 1점·개성 1점)에서 얻은 것이다.
이 가운데 ‘문산 8점’(찍개 4점, 뗀석기 2점, 몸돌 1점, 망치돌 1점 등)이 문산의 구릉과 잡화점에서 채집·구입한 구석기였던 것이다. ‘부싯돌용 도구’가 아니고…. 그런데 이 구석기들은 훗날 파주 주월리·가월리·금파리·전곡리 등 임진강·한탄강 주변에서 수없이 출토된 것과 매우 흡사하다. 결국에서 요코야마가 채집·구입한 유물은 모두 임진강·한탄강변에 살았던 고인류의 도구였다. 그러나 요코야마는 그것이 구석기인줄도 모르고 흘려버렸다.
■선사시대는 뒷전
그럴만도 했다. 그 때가 언제인가. 일제강점기였다. 일제는 한국 문화의 타율성과 정체성을 강조하는 데 혈안이 되었다. 우선 “단군설화는 근거가 없고, 한사군의 시기(기원전 108~기원후 313)부터 믿을만 하다”(<고적조사개요>)고 했다.
한반도에서는 원시적인 석기(신석기)시대에 머무르고 있다가 중국에서 청동기와 철기 같은 선진문화가 한꺼번에 유입되어 석기-금속기가 함께 쓰였다는 것이다. 이것이 ‘금석병용기 시대’ 용어이다. 그 뒤 한반도 남부에는 삼한을 정벌한 왜가 임나일본부를 설치했다고 강변했다.
결국 한반도는 중국의 북부 지배(기원전 108~기원후 313)와, 왜의 남부 지배(4세기 중후반~6세기 중엽)가 이어졌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니 일제는 평안·황해도에서 한사군(낙랑·대방), 경상도에서 임나일본부의 증거를 찾는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일제의 또 다른 관심은 금관총(1921)·금령총(1924)·서봉총(1926) 발굴에서 보듯 금관을 비롯한 황금유물 조사에 가 있었다. 일제는 금관을 일본의 화려한 문화로 둔갑시켰다.
■“구석기는 없다”
그런 마당에 굳이 한반도에서 구석기를 찾아다닐 이유가 없었다. 무엇보다 일본학계는 구석기는 일본 열도에도, 한반도에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었다. 일본열도에서 구석기는 1949년 군마현(群馬縣) 이와주쿠(岩宿)에서 처음 발견된다.
그러니 어찌되었겠는가. 일본 본토에도 없는 구석기 문화가 ‘감히’ 한반도에 존재한다는 말인가.
그래서 1935년 동관진에서 구석기 추정 유물이 출토되고, 그것을 논문으로 써서 학계에 보고(1940) 했어도 ‘말도 안되는 소리’로 폄훼됐다. 실제로 동관진 유적의 논문 작성자(나오라 노부오·直良信夫)가 헌병대에 끌려가 구타를 당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조선 역사가 일본보다 오래되었다고 해석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했다”는 죄목이었다.(실제로 동관진 유적에서 출토된 흑요석제 2점이 구석기가 맞냐는 논란은 현재까지 제기된다. 신석기 시대 문화층과 혼합된 석기라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아무튼 이런 분위기였으니 요코야마 교수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같은 해(1935)경기 파주에서 채집·구입한 석기가 구석기인지 판단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한반도 첫번째 구석기인
그렇게 동으로, 동으로 도미노처럼 이어진 ‘고인류-구석기’ 소식은 한반도 문턱에서 급정거했다. 그로부터 30년 가까이 지난 1963년 5월4일자 북한 노동신문이 흥미로운 기사를 싣는다. ‘함북 웅기 굴포리에서 구석기 유적이 발견되었다’는 것이었다.
“…구석기 유물이 발견된 것은 이번이 처음…1962년 차돌(석영)으로 만든 깬석기 1점이 발굴되어…1963년 4월 추가 조사에서 깬석기 5점이 나왔다…”(<노동신문>)
따지고 보면 1935년에 발굴된 동관리 유적 출토 구석기와 관련된 논란이 이어졌고, 같은 해 요코야마가 채집·구입한 유물도 구석기인지 몰랐던 상황이었다. 따라서 굴포리는 한반도에서 최초로 확인된 구석기 유적이라 할만 했다.
■미국인 부부의 출현
‘구석기를 든 인류의 발걸음’은 ‘일단 멈춤’을 끝내고 두만강을 건너 한반도 북부로 넘어온 것이다.
이제 휴전선을 건너 한반도 남부로 넘어올 차례가 되었다. 그 순간은 너무도 빨리 다가왔다.
이 대목에서 미국인 앨버트 모어와 릴리 L 샘플 부부가 등장한다. 위스콘신대 인류학과 박사 과정에 입학한 부부는 미국 국립과학재단의 지원을 받아 한국을 찾게 된다.(1962년) 부부의 관심분야는 한국의 선사 고고학이었다.
한국에 도착한 부부는 동해안·중서부·남해안 일대 등 100곳에 답사하며 유물을 수집했다. 그 중 공주 석장리에서 수습한 돌을 깨서 만든 긁개와 격지(몸돌에서 떼어낸 돌조각)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 와중에 모어 부부는 1963년부터 부산 동삼동 패총의 발굴을 주도했다. 동삼동 패총은 일제강점기인 1929~32년 발굴된 적이 있는 대표적인 신석기 유적이었다. 한국 선사시대를 전공했던 모어 부부에게는 안성맞춤인 발굴장이었다.
2년 전(1961) 서울대에 고고학과를 개설한 김원룡 교수(1922~1993)도 1기생(3학년생) 학생들을 아르바이트 겸 조교로 참여시켰다. 그러나 모어·샘플 부부가 주도한 동삼동 발굴은 큰 파문을 일으켰다. 외국인의 사실상 단독 발굴을 방치한 것이 문제가 됐다. 결국 김원룡 교수와 모어 부부는 결별하고 만다.
■석장리에서 찾은 구석기인
모어는 1964년 봄 학기부터 연세대에서 객원 학자 자격으로 대학원 특강을 맡았다.
이때 막 사학과에 부임한 손보기 교수(1922~2010)와 새로운 발굴 지역을 논의한다. 모어는 석장리에서 찾아낸 구석기 몇 점을 보여주며 “이곳을 한번 사전 답사해보자”고 제안했다. 1964년 5월 27일 손보기 교수와 모어 등이 석장리를 방문했다. 그곳에서 홍수로 무너져 드러난 퇴적 단면에서 구석기를 발견한다. 한반도 남부에서 첫번째로 찾아낸 구석기였다.
연세대 측은 이 사전 답사 결과를 토대로 석장리 발굴 허가를 신청하는 공문을 세차례 보낸 끝에 겨우 허가를 얻어냈다.
외국인(모어 부부)이 참여하는 발굴을 허락할 수 없다는 문화재위원회의 결의 때문이었다. 국내의 수많은 유적을 모어 부부가 허가없이 파헤쳤다는 비판이 가해졌다. 전공자인 김원룡 교수가 발굴 지도위원으로 참여하는 조건으로 발굴허가를 받을 수 있었다. 발굴단장은 손보기 연세대 교수가 맡았다.(손보기·김원룡 교수는 1922년생 동갑내기였다.) 그 사이 모아 부부는 한국을 떠났다.
■첫 출전에 날린 홈런
우여곡절 끝에 11월 초부터 연세대 발굴단의 조사가 시작되었다. 발굴 초부터 폭이 좁고 길이가 긴 작은 돌날(좀돌날)과 주먹도끼가 출토되기 시작했다. 한반도 남부에서 확인된 첫번째 구석기였기에 발굴소식이 언론에 크게 보도됐다.
“1만~3만년전으로 추정되는 구석기 시대 ‘마이크로브레이드(석검날) 1점, 스크레이퍼(박편석기)’ 3점, ‘핸드액스(손도끼) 1점 등과 석편 20여 종 발굴…우리나라 최초로 발굴된 후기 구석기 시대…”(동아일보 1964년 11월 18일)
“손보기 교수가 이끄는 연세대학원 발굴팀, 구석기 200여 점과 목탄(불탄 나무) 등을 발굴…우리나라 역사책을…수만년 더 소급할 수도…”(조선일보 1964년 11월24일)
경향신문 12월9일자는 석장리 발굴 성과를 첫출전에 홈런을 날린 학생야구팀에 비유했다.
“지난 11월10일 석장리를 찾아간 대학발굴대가 있었다. 연세대가 처음으로 시도하는 학생팀이었다. 인솔자는 사학과 손보기 교수. 경험없이 출전한 연세대팀. 그러나 그들의 첫 타석(배터)는 한국 인류거주사의 아득한 문을 열어제치는 홈런이었다.”
■석장리 사람들의 삶
석장리에서는 이후 2010년까지 모두 13차례 발굴조사를 벌였다. 발굴 때마다 후기 구석기 시대 집자리를 비롯해 돌날 및 좀돌날, 석기, 슴베찌르개 등 다양한 석기가 쏟아졌다. 문화층과 발굴유물을 토대로 구석기인들의 생활상이 복원하는 시도도 있었다. 즉 화덕에서 나온 재를 방사선 탄소연대측정을 한 결과 ‘3만690년±3000년 전’으로 추정됐다.
당시 석장리에서 살았던 이들은 현재의 우리와 같은 갈래의 사람들로 확인된 것이다. 그들은 돌날떼기를 이용해 돌날·밀개·새기개 등을 만들고, 기둥을 세워 움막집을 짓고, 화덕을 만들어 불을 피운 것이 확인됐다.
후속 발굴 결과 석장리 유적의 중기 구석기 층 연대는 7만~6만년전으로 판단됐다. 또 현재 금강의 수면보다 아래에 퇴적되어 있는 밑바닥층의 연대는 확인할 수는 없지만 10만년~20만년 전까지 올려볼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남녘의 구석기 발굴, 반갑다!”
석장리 3차 발굴을 막 끝낸 1966년 5월11일 북한 노동신문에 아주 흥미로운 기고문이 실렸다.
북한의 대표 고고학자 도유호(1905~1982?)가 “남조선 구석기 시대 유물 발견을 계기로 상호 교류하자”고 제안한 것이다.
“구석기 관련 소식이 남녘땅에서도 들려온다…충남 공주 금강상류에서 서울 연세대 모(손보기) 교수가 연구한단다…남조선에서 구석기 유물이 발견된다는 사실은 매우 기쁜 일이 아닐 수 없다.”
도유호는 “고고학자로서 공주 구석기를 좀 더 구체적으로 보고 싶은 생각이 북받쳐 오르지만…분단 때문에 그럴 수 없으니 실로 가슴 아픈 일”이라고 아쉬워했다. 그러면서 도유호는 북녘의 굴포리와 남녘의 석장리 발굴 성과가 거의 동시에 이뤄졌으니 공동 연구를 통해 한반도에서 살았던 구석기인의 실체를 파악해보자고 제의했다. 물론 반공을 국시로 하는 당시 한국에서 도유호의 제안은 용납될 수 없었다.
■“사람이 살고 있었다!”
어쨌든 손보기 교수가 주도한 석장리 발굴은 ‘북의 굴포리. 남의 석장리’ 등으로 한반도 구석기의 존재를 확인시키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세기 중반 이후 동으로, 동으로 그 소식을 전하던 구석기인의 발걸음이 한반도 북부에 이어 남부까지 이어졌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석장리의 경험은 1978년 학계에 보고된 경기 연천 전곡리 구석기 유적(27만 년 전)의 연구에도 디딤돌이 되었다. ‘전곡리’가 가장 오래된 구석기 문화로 더 각광을 받고 있지만 ‘석장리’는 한국 구석기 문화의 첫 장을 열었다. 그 가치가 크다. 올(2024년) 11월은 석장리 발굴 60주년을 맞이하는 해와 달이다. 다채로운 행사가 펼쳐진다.
9일부터 석장리박물관에서는 한국구석기학회 주최로 발굴 60주년 기념 학술대회가, 19일부터는 연세대 박물관이 ‘석장리, 기록을 만들다’라는 제목의 특별전을 잇달아 개최한다.
■주먹도끼의 용어
사족을 붙이자면 구석기 용어를 한글로 붙인 손보기 교수의 성과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사실 석장리 발굴 당시까지 구석기 용어는 제각각이었다. 손보기 교수의 글을 한번 인용해보자.
“영·독·불·중·일의 5가지 용어의 영향을 국내 선사학자들이 받게 되었다…예컨대 영어로 ‘hand axe’라고 하고, 프랑스에서는 ‘coup de poing’라고 하고, ‘biface’라고 하기도 한다. 중국에서는 ‘감벌기’라고 하면 일본에서는 ‘니기리 쓰지’ 또는 ‘니기리 오노(握斧·악부)’라고 한다. 이 모두가 어렵고 꼭 좋은 말이라고 할 수도 없다.”
손교수는 북한 학계가 고안한 우리말 용어를 참고하고, 손교수 본인이 나름 연구해서 중구난방인 구석기 용어를 우리말로 쉽게 번역했다. 그중 자르고, 찌르고, 찍고, 깎고, 벗기는 등의 다용도 도구인 ‘hand axe’(영어)와 ‘coup de poing’(프랑스어)는 ‘주먹도끼’로 번역했다. 또 긁개, 돌날, 돌대패, 뚜르개, 모룻돌, 밀개, 새기개, 찍개, 사냥돌, 찌르개 등의 용어도 풀었다.
물론 일부 용어는 다시 정리되었지만 손 교수가 구석기 용어는 상당수 통용되고 있다. 일본식 혹은 중국식 용어가 난무한 다른 고고학 분야 견주면 얼마나 대중적인가. (이 기사는 이융조 충북대 명예교수·한창균 전 연세대 교수·배기동 한양대 명예교수·이한용 전곡선사박물관장·서인선 연세대박물관 학예사·장용준 국립진주박물관장이 도움말과 자료를 제공해주었습니다.)이기환 히스토리텔러 lkh0745@naver.com
<참고자료>
손보기, ‘석장리의 새기개·밀개 문화층’ <한국사연구> 5권, 한국사연구회, 1970
손보기, ‘석장리 자갈돌 찍개 문화층’, <한국사 연구> 1권, 한국사연구회, 1968
석장리 구석기 연구회 엮음, <파른 손보기-그가 걸어온 학문의 발자취>, 2022
성춘택, ‘석장리 유적 발굴과 구석기고고학의 과제와 전망’, <한국구석기학보> 제31호, 한국구석기학회, 2015
이융조, ‘구석기와 함께 한 50년- 석장리에서 만수리까지의 궤적 ’, <현상과 인식> 38권 4호, 한국인문사회과학회, 2014
이융조, ‘석장리 구석기 연구 50주년의 성과와 과제 - 손보기 교수님의 업적을 중심으로’(한국고고학대회 특별강연회), 한국고고학회, 2014
장용준, ‘한국 최초의 구석기에 대한 시론: 橫山將三郞 자료를 중심으로’, <한강유역 선사유물: 橫山
將三郞의 채집 자료>, 국립중앙박물관, 2010
한창균·서인선·김수아, ‘석장리 구석기 유적: 발굴 60주년에 즈음하여’(<석장리유적발굴 60주년 기념학술대회 발표문), 한국구석기학회, 2024
한창균, ‘석장리 구석기유적 발굴의 학사적 의의’, <한국구석기학보> 제31호, 한국구석기학회,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