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자가 직업이니 그간 많은 사람과 악수했다. 대부분 기억에 없다. 단 한 명, 강렬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다.
런던특파원 시절이던 2014년 교황의 방한 일정을 동행 취재했다. 서울행 전세기 ‘셰퍼드 원(shepherd 1)’에서 그는 “여러분의 말이 우리를 세상 사람들과 결속하도록 하는 데 늘 도움이 된다. (순방 때) 평화의 메시지를 전달해 달라”고 인사한 뒤 72명의 기자와 일일이 마주했다.
교황이 뭐라 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의 눈은 기억난다. 호기심에 가득하고 장난기와 웃음을 머금은 동시에 뚫어보는, 그러나 불편하기보단 따뜻한…. 한 단어로 정의하기 어려운, 그 눈이 나를 향했다. 세상에 단둘인 듯했다. “정치인이었더라도 세상을 들었다 놓았겠다”는 생각이 스칠 정도였다. 서울에서 교황과 만난 이들도 비슷한 말을 했던 거로 기억한다. “온전히 나에게만 집중하는 느낌이었다.” 공감이었을 것이다.
방한 때 탁월한 공감 보여준 교황
12년 간 가톨릭 교회 변화 이끌어
마지막까지 "타인 배제·대립 말라"
‘바티칸’은 좀 달랐다. 놀라울 정도로 효율적이고 위계적인 제도였다. 교황은 ‘가장 작은 차 쏘울’을 탔지만 바티칸 경호원들은 대형 외제차를 요구했다는데, 교황·바티칸 관계도 비슷한 느낌을 주곤 했다. 이전부터 알고 지내던 외교부 관료를 현장에서 만났는데 “열 개의 (대통령) 순방을 담당했던 것보다 한 개의 교황 순방이 훨씬 까다로웠다”고 말했다.
리버럴하고 인간적이며 겸손한 교황, 2000년의 바티칸, 이 둘의 역학이 어떨지 내내 궁금했다. 실제 교황은 ‘변화’를 원했다. 낙태·안락사·동성결혼 반대 입장을 고수했지만, 대단히 인간적이면서도 개방적 태도를 취했다. 재혼·이혼 가정에도 손을 내밀고 140명 이상의 비유럽 출신 추기경을 임명, 더 세계화된 교회를 남겼다. 여성을 장관급에 인선하기도 했다. 하지만 미진한 부분도 많았다. 이코노미스트는 그의 12년에 대해 “가톨릭 교회를 변화시켰지만, 그가 원하는 만큼은 아니었을 것”이라고 썼다. 그럴 것이다.

그 자신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늘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느꼈고, 그 과정에서 내린 결정들이 결코 쉽지 않았고 문제가 생기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진실을 결코 감추어선 안 되고 투명하지 못한 처사는 언제나 최악의 선택이란 것 또한 잘 알고 있었다. 우리 시대는 긴박하다. 오늘을 붙잡으려 하면 이미 어제가 되어 있고, 내일을 잡으려 하면 아직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는다. 교황 재위 세월은 이러한 긴장 속에서, 저 너머를 바라보며 살아가는 시간이었다.”
얼마 전 발간한 자서전에 담긴 토로다. 그는 『희망』이란 제목을 달았다. 과거를 돌아본 건 더 멀리 내다보기 위해서라고 공저자는 설명했다. 그러나 두려움도 읽힌다. 1936년생인 그는 양차 대전의 영향권에 있었다. 60년대 초 이후엔 끊임없는 페론주의와 탄압, 도피한 나치와 결탁한 극우 집단들의 등장, 전국을 휩쓴 반유대주의 폭력과 테러행위, 게릴라 활동을 겪었다. 그와 가까운 인물들도 실종되거나 피투성이가 돼 나타났다. 극단의 시대, 광기의 시대였다. 혹여 이런 시대의 재래(再來)를 우려한 건 아닐까.
“이제 저는 깊은 세월을 살아온 분들에게 조심스레 묻고 싶다. 지금 우리가 겪는 이 모든 일이 과거의 어둠을 떠올리게 하지 않느냐. 인류가 다시는 되풀이하지 말아야 할 그 참혹한 역사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으냐.”
“전 세계 모든 이에게, 특히 젊은이들에게 호소한다. (중략) 타인과 대립하며 살아야 하고 다른 민족을 배제하고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의 말에 흔들리지 말라. ‘국민을 위해서’ ‘국가 안보를 위해서’란 명분으로 벌이는 수많은 전쟁의 이면에는 개인의 탐욕과 정치적 야심이 도사릴 뿐이다. 여러분, 새로운 악몽을 잉태할 뿐인 그들의 편협하고 답답한 꿈에 갇히지 말라.”
그는 자신을 ‘기나긴 역사 속에 한 걸음’이라고 했다. 어쩌면 그의 한 걸음이 아주 그리워질 수도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