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년째 꽃집 외길, 울산 발전 역사 함께해온 산 증인

2025-12-12

[울산저널]이선민 기자= ‘只道花無十日紅(지도화무십일홍), 此花無日無春風(차화무일무춘풍)’ 열흘 동안 붉은 꽃은 없다지만, 이 꽃은 봄바람이 불지 않는 날이 없구나! 중국 남송(南宋)의 시인 양만리((楊萬里)가 지은 시 ‘납전월계(臘前月季; 동지섣달 월계화 앞에서)의 한 구절로, 울산저널이 찾은 여성 리더 열한 번째 주인공인 싱글벙글꽃집 임미화 대표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시구가 아닐까 싶다.

‘미화(美花)’라는 이름과 잘 어울리는 직업을 가진 임 대표는 52년째 꽃집으로 외길을 걸어오며 울산 중앙통(중앙로와 삼산로)에서 울산 발전의 역사를 함께해 온 산 증인이기도 하다.

그의 친정은 대구에서 연탄공장을 운영하며 슬하에 5남 5녀를 유모 손에 키울 정도로 유복했다. 아버지가 빚보증을 잘못 서는 바람에 하루아침에 빈털터리가 돼 서울 옥수동 작은 고모집에서 온 식구가 얹혀살게 되면서 그는 난생처음으로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게 됐다.

그 시절 그는 “집안 형편이 어려워지다 보니 입 하나라도 덜어야 했고 작은고모의 중신으로 지금의 남편을 만났지만 근면 성실함 빼고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건 매한가지였다”면서 “그나마 어릴 때부터 손재주가 남달라서 남편이 일을 나가면 집에서 선물상자에 포장지를 까는 가내 수공업부터 뜨개질까지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며 쌈짓돈을 모았다”고 이야기한다.

젊었을 때라 힘들다는 생각도 없이 앞만 보고 열심히 살았다. “남편은 총각 때부터 사촌 형(훗날 통합 농협중앙회 초대 회장이 되는 정대근 씨)을 따라 영등포에서 청과시장 일을 도왔는데, 그 당시 ‘수박 밭떼기(밭에서 나는 작물을 밭에 나 있는 채로 몽땅 사는 일)’로 지방의 농사꾼들과 거래하면서 상품 가치가 있는 수박은 빼돌리고 나쁜 수박만 보내오는 업자를 잘못 만나 사업을 접어야 했다”며 힘들었던 시절을 회고했다.

첫째 딸이 100일이 될 무렵 생활고로 힘들어지면서 “남편이 공업화로 한창 일자리가 많다는 ‘울산’에 가보자고 제안했고, 쌈짓돈 3만5000원(그 당시 노동자 임금이 3~4만 원 정도)을 들고 무작정 울산으로 내려와 신정시장 부근에 5000원짜리 월세방을 얻게 됐다”고 했다. “신정시장에서 사과를 담는 나무 궤짝을 엎어놓고 꽃과 화분을 팔기 시작했는데 화분이 불티나게 잘 팔리면서 꽃꽂이와 조경에도 눈뜨게 됐다”며 꽃집을 시작하게 된 계기를 말했다.

그는 “남편이 웅촌에 있는 화분공장에 가서 외상으로 화분을 한 트럭 주면 꼭 갚겠다고 약속하고 화분을 싣고 울산에 올라왔는데 마침 화분을 통째로 다 사가겠다(일명 도리빵)는 분이 나타나서 화분을 다 팔고 공장으로 가서 돈도 다 갚을 수 있었다”며 힘들 때마다 주변에 도와주는 사람들이 귀인처럼 나타났다고 말한다.

울산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 보았을 ‘싱글벙글꽃집’(상표등록 제212673)이라는 상호에 대해서 “처음에는 남편의 고향 이름을 따서 ‘밀양꽃집’으로 지을까 했는데, 꽃을 주고받는 사람은 누구든지 언제나 웃을 수밖에 없으니 ‘싱글벙글꽃집’이라고 짓자고 합의해서 짓게 됐다”며 “인터넷이 없던 시절 전국 최초로 꽃 배달 서비스 네트워크를 통해 이름이 알려지면서 전국에 화훼업을 하는 분들은 ‘싱글벙글’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고 그는 전한다.

힘든 시기를 고비마다 넘길 수 있었던 힘은 주변에 고마운 사람들 덕분이라며 “갓 돌이 지난 딸아이를 방에 혼자 놔두고 가야 하는 상황에서 집주인이 아이 우유도 먹여주고 돌봐주고 하셔서 마음 편하게 일을 나갈 수 있었고, 조경업을 시작할 때도 마침 석공(石工) 한 분이 우리 가게로 우연히 찾아오게 되면서 숙식도 함께 하고 조경 일을 많이 돕고 가르쳐 줬다”면서 지금이라도 가게에 한 번 들러 주면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고 그는 말한다.

그는 “울산을 내려올 때 우리 아이들은 우리처럼 집 한 칸 없이 못 먹고 못 입는 서러움을 당하도록 하지 말자고 남편과 다짐했다”며 “지나고 보니 아이들에게 많은 재산을 물려주는 것이 도리어 아이들을 망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사회에 환원하는 일을 고민하게 됐다”고 속내를 털어놨다.

그는 지난 2022년 말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1억 원을 쾌척하며 울산 아너소사이어티 클럽 114호 회원이 됐다. “사람 일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으니 하루라도 건강할 때 내가 도움받은 이웃들에게 도움 되는 일을 하고 싶었다”며 “기부를 하고 나니 내가 돈을 벌 때보다 훨씬 더 기쁜 마음이 들었다”고 한다.

반평생 꽃에만 파묻혀 살았을 법도 한데 “인터넷이 활성화되고 꽃집이 한창 많이 생기면서 예전처럼 ‘억척같이’ 일하던 시절이 끝나갈 무렵, 50대 초반 수묵화에 색을 입히는 ‘문인화’를 시작하게 됐다”는 그의 미술 실력 또한 전문가 수준으로 지금까지 개인전과 단체전 출전만 해도 270여 차례가 넘는 한국미술협회 정회원이자 울산미술협회 초대작가다.

그는 마지막으로 “살면서 겪는 모든 경험과 만나는 모든 인연은 하나도 버릴 것이 없고 나에게 깨달음과 도움을 줬다”면서 “무슨 일이든 미쳐야 하고 그러다 보면 돈은 따라오게 돼 있는데 그 돈은 나와 내 가족만 잘 먹고 잘살라고 나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기에 사회에 베풀고 다 함께 잘 사는 세상 만들기에 나부터 동참할 테니, 많은 분이 기부에 참여했으면 하는 바람이다”라고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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