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있는 이야기] 저승 문턱 다녀와도 잊을 수 없는 진미…‘황복’의 두 얼굴

2025-03-18

“하돈에 미혹된 자들은 맛이 유별나다고 떠벌린다. 비린내가 솥에 가득하므로 후춧가루 타고 또 기름을 치네. 고기로는 쇠고기도 저리 가라 하고 생선으로는 방어도 비할 데가 없다네. 남들은 보기만 하면 좋아하나 나만은 볼 때마다 걱정이 앞서네. 아! 세상 사람들아, 목구멍에 윤낸다고 기뻐하지 마라. 으스스 소름 끼쳐 이보다 큰 화가 없고 벌벌 떨려 해 끼칠까 걱정되네.”

이 글은 정조 때 서얼 출신임에도 학문이 높아 늦은 나이에 규장각 초대 검서관이 됐던 이덕무(李德懋, 1741∼1793)가 썼다. 글 제목은 ‘하돈을 탄식하다(河豚歎)’다. ‘하돈’은 복어(鰒魚)다. 복어는 적의 위협을 받으면 갑자기 배가 부풀어 오르면서 소리를 낸다. 이 소리는 복어가 이빨을 가는 소리다. 옛사람들은 이 소리가 마치 돼지가 울부짖는 듯하다고 여겨 ‘강의 돼지’라는 뜻으로 복어를 ‘하돈’이라고 불렀다.

복어는 강은 물론이고 바다에도 산다. 주로 서울에서 생활했던 이덕무가 본 복어는 음력 3∼4월 산란을 위해 서해에서 한강으로 올라온 ‘황복’이다. 강이나 바다 서식지에 상관없이 복어 대부분은 난소를 비롯해 간·장·피부에 ‘테트로도톡신(tetrodotoxin)’이라는 독을 가지고 있다. 테트로도톡신은 독성이 청산가리의 1300배가량에 맞먹는 맹독이다. 이것을 먹은 사람은 처음엔 구토를 하다가 근육 이완이나 감각마비가 오고, 심각할 경우 죽음에 이른다.

하지만 황복국의 절묘한 맛은 사람들을 유혹했다. 조선초 문신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은 “한강가에 삼월이 되니, 가랑비에 복사꽃에 파란 물결 가득 차네. 바야흐로 하돈 맛이 좋을 때이건만, 조각배로 돌아가기에는 안타깝게도 너무 늦었네”라는 시를 읊조렸다. 이러니 음력 3월 한강에서 잡은 황복으로 끓인 국을 앞다투어 먹지 않고 어떻게 견딜 수 있었겠는가?

그렇다면 어떻게 요리했을까? 영조 때 왕실 의관 유중림(柳重臨, 1705∼1771)은 ‘증보산림경제’의 ‘치선’에서 “복어를 가져다가 그 배를 가르면 얼기설기 핏줄이 보인다. 날카로운 칼로 깎아 버려 조금도 남기지 않는다. 또 조심스럽게 아가미를 벌려 피를 빼는데 고기를 조금이라도 상하게 하지 마라. 백반(白礬) 작은 것 한 덩어리를 솥에 넣고 기름을 많이 붓고 미나리와 소루쟁이를 넣고 장과 물로 싱겁게 간을 맞추어라. (중략) 약한 불에 1∼2시(時) 끓여서 먹는다”고 적었다.

문제는 황복의 독이었다. 허균(許筠, 1569~1618)은 “황복국을 먹은 사람이 많이 죽는다”고 했다. 숙종 때 영의정 최석정(崔錫鼎, 1646∼1715)은 황복국을 먹고 죽지는 않았지만 저승 문턱까지 다녀왔다. 이덕무는 살아가면서 지켜야 할 작은 예절 지침을 적은 ‘사소절(士小節)’이란 책에서 거듭 “하돈은 먹어서 안되니, 자손에게 유훈으로 삼게 하는 것은 습속에 물들기 쉽기 때문이다. 설령 죽지 않는다고 해도 그것은 요행으로 모면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식민지 시기에 조선에 온 일본인들도 황복을 즐겨 먹었다. 1920년대 중반 서울의 굶주린 사람들은 일본인이 운영하는 점포에서 버린 복어의 내장이나 머리를 끓여 먹고 부지기수로 죽었다. 조선총독부가 나서서 경고 담화를 발표했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일본 정부처럼 ‘복어 식용 금지령’을 발포하진 않았다. 1962년에야 한국 정부는 복어요리전문가에게 ‘특수식품취급자’ 증명서를 발급했다. 그때부터 황복국과 바다복국이 주당들의 꽉 막힌 식도를 풀어줬다. 그렇다고 복어 맛에 열광하지 말자. 이덕무가 강조한 “목구멍에 윤낸다고 기뻐하지 마라”는 말을 명심하자. 이 말은 음식이 지천으로 깔린 요즈음, 사람들에게 전하는 미식 지침이면서 동시에 세상살이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주영하 한국학중앙연구원 민속학 교수·음식 인문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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