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삼군’(三軍)으로 불리는 육군과 해군, 공군 가운데 공군의 출범이 제일 늦었다. 공군 무기 체계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항공기가 20세기 들어서야 출현했으니 당연한 일이다. 1903년 미국의 라이트 형제가 인류 최초의 동력 비행기를 만들었을 당시 세계 최대의 군사 강국은 미국이 아니고 유럽에 있는 영국, 독일, 프랑스 등이었다. 이들 나라의 군대 지휘부는 일찌감치 항공기의 군사적 이용 가능성에 주목하고 일부는 비밀리에 라이트 형제와 접촉하기도 했다. 전장에 비행기를 띄우면 적 후방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정찰과 탐지가 가능했다. 상공에서 지상으로 폭탄을 투하할 수도 있었다. 이렇게 해서 제1차 세계대전(1914∼1918) 기간 동안 항공기가 처음 전쟁이란 무대에 등장하게 되었다.
1차대전을 거치며 유럽 각국은 군용기의 중요성에 눈을 떴다. 가장 대표적인 나라가 영국이다. 당시만 해도 영국의 군용기는 육군 항공대와 해군 항공대로 나뉘어 운용되고 있었다. 1918년 4월 영국은 육군과 해군에서 항공대를 떼어낸 뒤 서로 합쳐 공군을 창설했다. 그런데 같은 해 11월 독일의 항복 선언으로 1차대전이 끝나며 독립한 영국 공군은 제대로 활약할 기회를 놓쳤다. 그로부터 20여년이 지나 제2차 세계대전(1939∼1945)이 터진 뒤 영국 공군은 독일 공군과의 공중전에서 승리하며 조국을 구하는 데 핵심적 역할을 했다. 윈스턴 처칠 당시 영국 총리는 공군 조종사들에게 “인류의 전쟁터에서 그렇게 적은 사람들(조종사)에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큰 빚을 진 적은 일찍이 없었다”고 찬사를 바쳤다.
1945년 8월15일 한국이 일본 식민지에서 해방되며 장차 나라를 지킬 군대 창설 움직임도 본격화했다. 육군과 해군의 경우 광복 직후에 이미 독립적 군종(軍種)으로서 구색을 갖췄다. 당시는 한국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던 미국도 아직 육·해군에서 분리된 공군을 만들기 전이었다. 그 때문에 한국인 가운데 항공 분야에 지식과 경험이 있고 장차 공군을 이끌 포부를 지닌 이들도 일단은 육군에 입대해 군사적 경력을 쌓아야 했다.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육군 안에 ‘항공기지사령부’라는 부대가 생겼다. 전투기는 한 대도 없고 연락기가 전부인 빈약한 전력이었으나 장병들의 사기는 드높았다. 이 항공기지사령부가 이듬해인 1949년 10월1일 육군에서 독립해 지금의 공군이 됐다.
2일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에서 아주 뜻깊은 행사가 열렸다. 2025년 을사년(乙巳年) 새해를 맞아 기념관을 찾은 첫 방문객에게 꽃다발과 기념품을 증정하며 축하하는 자리였다. 올해 들어 최초로 기념관에 발을 내디딘 이는 각각 공군 제8전투비행단, 17전투비행단에서 복무 중인 김민재 병장 그리고 김준영 병장이라고 한다. 두 현역 군인은 기념관을 찾은 이유에 대해 “새해를 맞아 우리나라 국난 극복의 역사와 군 선배님들의 활약을 돌아보고 싶어서”라고 답했다. 기념관 운영 주체인 전쟁기념사업회의 백승주 회장은 “오늘(2일) 기념관에서 의미있는 시간을 보내기 바란다”고 덕담을 건넸다니 훈훈하기 그지없다. 올해 기념관 방문만큼은 육·해·공군 중에서 공군이 제일 빨랐다.
김태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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