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임세혁 교수]
1. 장면 하나
1992년이었나 1993년이었나 기억이 잘 나지는 않는데 그때쯤이었던 것 같다. 늘 그렇듯이 텔레비전 앞에 앉아서 ‘가요톱텐’인지 다른 방송인지 기억도 가물가물하지만 어쨌든 음악 방송을 보고 있었는데 댄스 가수들의 순서가 끝나고 나서 마르고 지극히 평범하게 생긴 사람이 혼자 목에 하모니카, 어깨에는 기타 하나를 메고서 텅 빈 무대 위에 섰다.
그때는 발라드를 불러도 뒤에 무용단이 나와서 무대를 채우곤 했던 때였는데 아무것도 없는 무대에 가수가 혼자서 기타 한 대 들고서 노래를 부른다는 게 어린 내 눈에는 너무 신기했다. 장판교에서 조조의 십만 대군을 홀로 상대하는 장비도 아니고 바로 직전까지 시끄러운 음악과 함께 열댓 명이 함께 춤을 추던 무대를 혼자 무슨 수로 채운다는 말인가? 그것도 녹음된 반주도 없이 통기타 한 대만 들고서 말이다.
가수는 마이크에 대고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김광석입니다. <나의 노래> 들려드리겠습니다.”
나는 그날 이후로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이에게 시와 노래는 애달픈 양식’이라는 <나의 노래> 도입부를 잊을 수가 없다. 그날 그 프로그램에 어떤 가수가 나와서 무슨 노래를 했는지는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데 김광석이 부른 <나의 노래>는 어제 일처럼 선명하게 기억한다. 그의 ‘조그만 읊조림’이 가져다준 ‘커다란 빛’을 그날 나는 처음 보았다.
2. 장면 둘
대학을 졸업하고서 한국으로 돌아와 군대에 가게 되었다. 당시는 모 가수가 군 입대를 피하려고 미국 시민권을 취득했다가 한국 출입을 금지당하는 등 병역 관련해서 국민의 분노가 찐빵처럼 부풀어 오를 때였는데 이런 이유 때문인지 병무청이 마치 나의 귀국을 기다렸다는 듯이 입대 영장을 보내왔다. 그런데 당시 나는 영장 받고 끌려가는 건 뭔가 모르게 징역 살러 가는 느낌이라 차라리 자원입대 하겠다며 공군으로 입대해서 진주에 있는 공군 교육사령부에서 기본 군사훈련을 받게 되었다.
훈련소에 입소해서 일주일의 가입교 기간을 거쳐서 2주 차가 되었을 때 예정되어 있던 정훈교육을 받으러 강당으로 향했다. 보통 정훈교육은 대위 정도 계급이 되는 정훈장교가 하기 마련인데 그날 정훈교육은 별 하나를 달고 있는 훈련단장이 직접 하는 날이었고 ‘짝대기 하나’도 받지 못한 훈련병이었던 우리는 위풍당당한 ‘별’을 보고서 속된 말로 완전히 쫄아버렸다. 바짝 얼어있는 훈련병들을 둘러보시던 ‘하늘의 별’께서 인자하게 입을 열어 말씀하셨다.
“집을 떠나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을 여러분을 위로하기 위해 제가 사회의 노래를 하나 준비했습니다.”
하모니카 전주가 흘러나온다. 아뿔싸, 김광석이 부른 <이등병의 편지>다. 명색이 장군이라는 사람이 인자하긴커녕 악독하기 그지없다. 여기서 이 노래를 틀다니...
아니나 다를까, 여기저기서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아무리 무심한 사내놈들이 모인 곳이라 하더라도 단절이 주는 상실감과 거기서 오는 우울감은 생각보다 크다. 거기다가 이런 상황에서의 눈물은 전염성이 강하다. 전파 속도가 거의 최루탄 수준이다. 결국 그날 강당은 울음바다가 되었다. 그게 벌써 근 20년이 다 되어가는 이야기니, 당시 정훈 교육에서 장군이 어떤 주제로 얘기를 했는지는 하나도 기억나지 않지만 슬픔으로 무방비가 된 마음에 김광석의 쓸쓸한 목소리가 흘러 들어가면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는 생생하게 기억한다.
3. 장면 셋
20대의 마지막 무렵에 <서른 즈음에>를 엄청 많이 부르고 다녔다. 10대에서 20대가 될 때는 그다지 특별하다는 감정이 없었고 오히려 빨리 20대가 되고 싶었던 것 같다. 거기다가 나는 어렸을 때는 나의 우상이었던 지미 헨드릭스나 짐 모리슨, 커트 코베인 같이 27살이 되면 세상을 떠나지 않을까? 하는 철부지 같은 생각을 하기도 했으니 서른이라는 나이는 나에게 상당히 낯선 나이였다. 그렇게 서른이라는 나이를 마주하게 되었으니, 나의 관심사는 온통 내가 얼마나 <서른 즈음에>를 멋지게 부르는 서른 살이 될 것인가에 있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게 딱히 나에게 와 닿지 않았다는 것이다. 서른이 되었지만 난 여전히 어른이라고 보기에는 살짝 모자란 감이 있었기에 ‘내가 떠나온 것도 아닌데, 내가 떠나온 것도 아닌데’라는 가사가 그다지 나에게 특별한 의미로 다가오지 못했다. 오히려 ‘김광석이 실제 나이 서른에 이 노래를 불렀다고 하는데 나의 서른은 왜 그렇게 다가오지 않는 걸까’라는 자괴감에 한참을 시달려야만 했다.
그런데 뜻밖에 이 문제의 해답을 준 것은 시간이다. 20대에서 30대로 넘어가는 것보다 30대에서 40대로 넘어가는 게 바뀌는 것이 더 많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렇게 바뀌는 것, 떠나보내는 것, 잃는 것들이 하나둘씩 생기기 시작하면서 ‘점점 더 멀어져간다. 머물러있는 청춘인 줄 알았는데 비어가는 내 가슴속엔 더 아무것도 찾을 수 없네’라는 가사가 만년필 펜촉에서 종이로 잉크가 스며들 듯 그렇게 스며들기 시작했다.
생각해 보면 당연하다. 그때의 서른과 지금의 서른은 완전히 다른 나이다. 뮤지컬 <틱틱붐>에서 작곡가 조나단 라슨은 1990년에 서른이 되지만 이룬 것이 없는 자신을 보며 느끼는 극도의 불안감을 노래로 표현하면서 서른을 무언가 이루어야 하는 나이라고 정의하는데 요즘은 서른보다는 마흔이 그에 더 걸맞은 나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엄밀히 말하면 <마흔 즈음에>라고 해도 되는 게 아닐까? 어차피 노래 가사 전체를 봐도 서른이라는 단어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으니 살짝 바꾼다고 누가 뭐라고 할 사람도 없을 것 같은데 말이다.
김광석의 노래에 대해 그의 친구인 가수 박학기는 “김광석의 노래는 인생의 길목 길목 우리가 지나가는 문 옆에 있습니다.”라고 표현했는데 생각해 보면 나에게도 그랬던 것 같다. 노래를 하면서 사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올렸던 노래가 <나의 노래>였고, 생각한 대로 일이 풀리지 않아서 좌절의 늪 속에 끝도 없이 빠져갈 때 <일어나>를 들었다.
군대를 갈 때는 모든 군인이 그렇듯이 <이등병의 편지>를 닳도록 불러댔었고 불침번을 서며 마음속으로 ‘나팔 소리 고요하게 밤하늘에 퍼지면 이등병의 편지 한 장 고이 접어 보내오’라는 대목을 마음속으로 부르다가 눈물을 삼킨 적도 셀 수 없이 여러 번이다. 사랑에 실패한 다음 날에는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을 들었고 지나간 사랑의 뒷모습을 자꾸 돌아보며 들었던 노래는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였다.
10대 후반에는 ‘무서운 것이 내게는 없소’라는 가사가 내 모습이 되면 좋겠다 싶어서 <나무>라는 노래를 좋아했으며 30대 후반부터는 ‘점점 더 멀어져간다’라는 도입부가 내 마음 같아서 <서른 즈음에>를 자주 듣고는 한다.
그가 어떤 가수고 어떤 음악 인생을 걸어왔는지, 그런 것들이 내가 김광석을 좋아하는 까닭은 아니다. 내가 김광석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그의 노래를 듣다 보면 지금의 내 마음을 읽는 노래가 하나는 반드시 나오기 때문이다.
네이버 지식인에서 김광석이 왜 유명한 가수인지를 묻는 말에 “이 사람 노래가 내 마음을 읽습니다.”라는 답변을 누군가가 단 적이 있다. 엄청나게 멋지지 않은가? 인생의 곳곳에 있으면서 그때마다 우리의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노래를 하는 가수라니 말이다. 그가 떠난 지 조금 있으면 30년이 다 되어가지만, 우리가 여전히 그를, 그의 노래를 보내지 않고 기억하는 까닭이 바로 이런 것 때문이 아닌가 한다.
적어도 나에겐 노래 가사처럼 그의 조그만 읊조림이 커다란 빛이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