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김민서 기자] "제 마지막 버킷리스트는 제자 양성이에요. 1990년대가 화려한 인생 1막이었다면, '교원의 길'을 걷는 지금은 인생 2막인 거죠. 교육은 제 사명이에요." 1990년대를 호령한 슈퍼스타 김원준. 데뷔 34년차 베테랑 싱어송라이터인 그는 이제 무대 보다 강단이 더 익숙하다. 후학양성에 힘 쏟은 시간만 어느덧 20년. 책임감과 사명감은 '교수 김원준'을 있게 한 원동력이다.
김원준 교수는 올해 3월 경기도 의정부시에 위치한 경민대학교 실용음악과 전임교수 겸 학과장으로 부임했다. 최근 경민대 캠퍼스에서 미디어펜과 만난 김 교수는 "새로운 환경에서 학과장 업무를 시작한 만큼, 학과의 장점은 극대화하고 단점은 보완하는 학과장 업무에 중점을 두려 한다"고 포부를 밝혔다.

2006년 숭실대 시간강사를 시작으로 교원의 길에 입문한 그는 대구예대, 동부산대 등을 거쳐 2013년 강동대 학과장을 역임했고, 올해 경민대와 새롭게 인연을 맺었다.
김 교수가 경민대 학과장으로서 가장 먼저 시작한 프로젝트는 '2025 멀티 스튜디오'다. 전문 레코딩 스튜디오, 최첨단 다목적 시청각 강의실 등을 갖춘 공간이 교내에 마련된다. 이미 신축공사에 들어가 오는 7월 초 완공된다. 학생들은 올해 2학기부터 사용할 수 있다. 그는 "직접 프레젠테이션을 진행해 학교를 설득했다"며 "제 모든 노하우를 갈아 넣은 야심작이다"고 자신했다. 14년 역사의 경민대 실용음악과에 새로운 비전을 제시한 것이다.
김 교수는 "대학 전문기관에 대해 '자신이 다녔던 학원보다 못하다'는 민원이 들리곤 한다. 이것이 불편한 진실이 된 지 오래"라면서 "'멀티 스튜디오' 설계와 디자인에 제 오랜 경험을 고스란히 담았다. 이곳이 K-팝 제작 시스템의 표준이 될 거라 자신한다. 최적의 교육환경에서 더 특별한 K-팝 아티스트가 탄생할 것"이라고 말했다.
전문 지식을 기반으로 한 밀도 높은 수업과 세심한 교육법은 김 교수가 가진 강점이다. "2006년 친한 선배의 권유로 첫 강의를 시작했다. 마치 운명 같았다"던 그는 강사, 겸임, 초빙, 전임으로 차츰 교원의 길을 넓혔다. 전문 교육법에 대한 갈증으로 뮤직테크놀로지와 뉴미디어음악학으로 석·박사 과정을 거쳤고, 이를 통해 컴퓨터 음악 관련 전문 지식과 테크닉을 마스터했다. 김 교수는 "'교수'의 역할은 무엇이고, 어떤 것이 중요한지 실감하면서 자연스럽게 더 좋은 교육자가 되겠다는 다짐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김 교수의 '열혈 행보'는 학생들 사이에서도 이미 유명하다. 이날 김 교수가 진행하는 실용음악과 전공 필수 교과목 DAW(Digital Audio Workstation) & 트랙메이킹 수업에서 만난 오명수 학생은 "(김 교수가) 학과장으로 오신 후 '멀티 스튜디오' 유치를 위해 직접 프레젠테이션을 하신 것을 알고 있다. 학생들에게 부족한 시설과 장비들에 대해 굉장히 신경 써 주셔서 저희도 더 적극적으로 연습할 수 있게 됐다"며 감사를 표했다. 웃음이 많은 만학도 오승은 학생은 "(김 교수는) 연예인으로만 알았는데 교수님 그 자체다. 강의도 좋지만 인성이 최고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강의실에서 본 김원준은 '소탈한 교수'였다. 김 교수는 강의실로 들어오는 학생들을 향해 농담을 던지며 유쾌한 수업의 시작을 알렸다. 여러 학생들을 아우르는 동시에 일 대 일 밀착 교육으로 세심하게 수업을 이끄는 모습이 눈길을 끌었다.
김 교수는 "DAW 관련 수업들은 컴퓨터 음악이 핵심이기에 교과목 차원에서 평준화 수업에 한계점이 있다. 컴퓨터 음악 관련 수업 노하우 등을 적극 활용해 학생들의 중도 탈락 없이 한 학기를 마치는 게 교습자의 역할이자 의무"라며 "제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학생들의 수준 높은 흥미를 이끌어 내고자 한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지금도 활동하는 '대중음악인'으로서 과거, 현재, 미래를 음악적 교육으로 멘토링 할 수 있다는 점을 자신의 또다른 경쟁력으로 꼽았다. 그는 "미래 중심 음악 산업이 될 AI 기술을 활용한 음악 교육법을 석·박사 과정을 통해 이미 준비했다. 과거, 현재, 미래 음악 교육을 전공자들의 요구에 맞춰 채워줄 수 있는 게 저만의 특화된 교육법이다"고 말했다.

'교수 김원준'으로 제 역할을 다 하고 있지만, 강의실 밖에선 여전한 '슈퍼 스타'다. 1990년대 '가수 김원준'을 기억하는 학부모들은 때로 제자보다 더 가깝게 느껴질 정도다. 김 교수는 "제자보다 학부모님들과 전화할 때 더 편할 때가 있다"며 웃었다. 시대를 관통하는 음악, 세대를 뛰어넘는 음악이란 말을 실감케 하는 일화도 있었다.
"아버님 한 분이 '너무 힘든 시기에 '쇼'를 듣고 결정적인 선택을 하지 않았다'고 말씀해 주셨어요. 제가 '은인 같은 존재'라고요. 그래서 자녀가 제가 있는 학교에 입학한다고 했을 때 '김원준 교수가 '그 김원준'이냐. 그럼 무조건 가라'고 하셨다고 해요. 굉장히 기억에 남아요."
공부와 취미를 좋아하는 9살 첫째, 흥이 넘치는 4살 둘째까지 두 딸의 아빠이기도 한 김 교수는 "부모와 교수의 역할이 비슷하다"고 표현했다. 그는 "자녀와 학생들을 책임지고 이끌어 가야 한다는 책임과 사명감이 많이 닮아있다. 육아처럼 교직도 제 인생의 긴 숙제이자 본분이란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1992년 데뷔해 '모두 잠든 후에', '쇼' 등 수많은 히트곡을 발표한 김 교수는 잘 알려진, 그러나 잘 알려지지 않은 싱어송라이터다. 노래만 부르는 가수로 생각하는 이들도 있지만 그는 작사, 작곡, 편곡 등 저작물만 357곡(2024년 기준)을 보유하고 있다. 솔로 활동 이후에는 밴드 베일, 그룹 M4, 빈방 프로젝트 등을 통해 꾸준히 음악 활동을 이어왔다. 대표곡 '모두 잠든 후에'도 김 교수의 손에서 탄생한 곡이다. 학생들에겐 '교수'이자 '대선배'다.
"학생들은 '전공자'예요. 말 그대로 '실용음악'이라는 전공을 잘 살릴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고 싶어요. 대학 안에서는 멘토와 멘티의 관계이지만 더 크게 보면 자기 분야의 대선배에게서 필요한 걸 잘 배웠다는 긍지를 심어줄 수 있는 게 저의 무기죠. 학생들에게 교수를 넘어 하나의 롤모델이 돼 주고, 같은 길을 걸어가는 선배로서 나침반의 역할을 해주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