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님, 이 상처가 곪았을까요?” 한쪽 다리를 걷어 올리고, 얼마 전 넘어져 생긴 무릎 상처 부위를 보여주며 괴사 여부를 도반 스님에게 물었다. 역시나 한 마디 물었더니 열 마디가 돌아왔다. 항생제연고는 바른 거냐, 옷을 그렇게 껴입고 있으니 안 낫는다, 병원 가서 치료부터 받아라 등등. 잠시 입가에 미소가 머물다 갔다. 걱정해 주는 잔소리는 언제라도 들어줄 만하니까.
나이 들수록 상처가 잘 낫지 않는다. 이렇게 짧은 머리임에도 흰머리가 눈에 띄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사대(四大·地水火風, 몸을 이루는 요소)가 무너지는지 자주 아프고 천천히 낫는다. 쉽게 되는 일도 별로 없는 것 같다. 마음도 그렇다. 용기는 줄어들고 걱정은 많아진다. 마음은 안 늙는 줄로만 알았더니, 기분상으로는 마음도 퍽 늙는다. 그래서 나이 들수록 봄이 더 기다려지는가 보다.
세상 잣대로 내 행복 재지 말자
꽃 볼 설렘과 허탕친 실망 사이
부족한 현실 받아들이면 행복

올해는 나만의 특별한 봄맞이를 해야지, 그렇게 다짐하며 3월을 맞이했다. 그런데 이맘때가 참 이상하다. 금세 봄인 것 같은데, 온기는 있어도 별안간 몸을 움츠러들게 만든다. 날씨는 내가 어떻게 할 수 없지만, 내가 해야 할 일들은 스스로 통제가 가능하다는 생각이 문득 머리를 스친 어느 날, 때아닌 3월의 눈보라가 휘날리는데 일을 다 팽개치고 구례 화엄사에 매화를 보러 갔다. 구례에 매화가 피었는지 가기 전에 분명 아는 스님에게 여쭈어 보고 피었다는 대답을 들어서 갔는데, 구례 읍내에는 매화가 피었으나 정작 화엄사는 아직이었다. 나의 질문이 시원찮았던 게다. 화엄사에 매화가 피었느냐고 명확하게 물었어야 했다.
매화나무 앞에서 마침 그곳 스님을 만나게 되어 다시 여쭈었다. “스님, 이 매화는 언제 핍니까?” 맘씨 좋게 생긴 스님은 허허 웃으며 “그걸 저한테 물으면 어찌합니까, 당사자인 매화에게 물으셔야지요”라고 대답했다. “그렇군요.” 또다시 질문이 꽝이었다. 그리하여 매화나무 앞에 잠시 서 있었는데, 뭐가 그리 좋은지 나도 모르게 실실 웃음이 났다. 그냥 그 상황이 다 웃긴 게다. 곁에 서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스님의 시선이 따갑게 느껴져 얼른 말씀드렸다. “스님, 매화가 2주 후에 핀답니다.”
“이 나이에는 이것저것 못 따진다. 어떤 행복은 우스꽝스러운 포장지 속에 들어 있다.” 간밤에 읽던 안가엘 위옹의 소설 『행복은 주름살이 없다』의 한 구절이다. 이것저것 안 따지고 그 먼 거리를 달려갔는데, 헛걸음하느라 고생했다고 돌아온 설렘과 실망 사이 어디쯤의 행복 같았다.
그렇게 전국에 눈이 흩날리던 3월, 질펀한 땅을 밟고 가서는 별수 없이 통통해진 꽃봉오리만 보고 돌아왔다. 기대만큼의 만족은 아니지만, 그래도 뭐 계획한 대로 나름의 봄맞이를 확실하게 하고 온 셈이다. 돌아오는 내내 혼자서 행복했다.
대체로 우리는 세상의 잣대로 자신의 행복을 재고 평가하곤 한다.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에서 성공해야만 행복하다고 이미 재단된 상태로 나의 행복과 남의 행복을 비교하면서 속상해한다. 최근 괴로움을 하소연하며 죽고 싶다고 말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 또한 그런 이유에서였다. 아마도 대부분 사람이 좋아하지 않는 일을 하면서 살아가기 때문에 이런저런 부정적 관념이 자라난 듯하다. 원치 않는 일을 오래 하면 쌓인 스트레스로 버거울 테니까.
그렇다고 좋아하는 일만을 해오면서 성공에 이르러 부와 명예까지 다 얻는 사람도 사실 별로 없다. 좋아하는 일을 하려다 보니 빈곤하다거나, 좋아하지 않는 일이지만 수입이 좋아서 그 일을 버리지 못한다거나, 어느 한쪽으로 치우친 경우가 많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방법은 생각보다 쉽다. 좋아하는 일을 하든지, 지금 하는 일을 좋아하면 된다. 그런데 그게 말처럼 쉽지 않다. 알면서도 마음 다스리기가 어렵다. 그렇다고 죽을 수는 없지 않은가.
나라고 별수 없다. 머리를 깎고 살아보니, 출가 생활이 좋아하는 삶의 방식은 아니었다. 다만 아주 오래전에 지금 하는 일을 좋아하기로 했고, 덕분에 안정적으로 균형 있게 사는 편이다. 불교에서의 행복은 번뇌를 버리고 얻게 되는 내면의 평온과 탐욕을 버리고 얻는 소욕지족(少欲知足)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부처님은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면 일단 괴로움의 원인을 찾아내 소멸시키면 된다는 원리를 가르쳤다. 나는 누구보다 열심히 구구절절 배웠고, 그렇게 살기 위해 선택한 삶의 방식이 그러했다.
우리는 자유롭고 편히 살아가는 방법을 알고 있다. 누군가가 나를 헌신적으로 돌보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고, 깨지기 쉬운 계란 껍데기처럼 마음이 연약하대도 어찌어찌 살아갈 수 있다. 어차피 때 되면 다 죽는데, 굳이 죽을 생각도 할 필요 없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고 하지 않던가. 그러니 힘내보자. 어딘가에서 봄이 오고 있다.
원영 스님 청룡암 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