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이야기를 더 크게 들려주세요

2025-03-27

‘나 그거 트라우마잖아’라는 이야기들을 거리에서 들을 때면 ‘그게 어째서 트라우마?!!’라며 말을 붙이고 싶어집니다. 사실 많은 오해를 받고 있는 ‘트라우마’ 즉 외상이라는 용어는 심리학적 관점에서는 상당히 무거운 개념으로, 죽음이나 혹은 생명에 위협이 되는 정도의 심각한 부상 및 성폭력 사건을 말합니다.

안타깝게도, 이런 트라우마 경험이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학대와 폭력이 수년간 이어졌거나 혹은 내전·전쟁이 지속되는 상황입니다. 장기간의 반복적인 트라우마는 더욱 복잡하고 심각한 증상을 만들어냅니다. 복합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C-PTSD·Complex PTSD)의 출현입니다.

내 생명 좀먹는 트라우마 경험

회상해 꺼내면 기억서 휘발돼

살아남은 자신 꼭 다독여줘야

이때 특징적인 증상들이 있는데, 감정을 조절하기 어려운 것이 첫 번째입니다. 즉, 거대한 부정적 감정을 소화하고 처리하는 일이 어려워 분노와 우울이 심해지거나 아예 감정을 차단합니다. 또한 자신에 대한 생각도 왜곡됩니다. 내가 애초에 틀렸고, 잘못되었고, 취약하다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사람으로 인한 상처가 너무나 커서 타인이나 세상을 믿는 것도 어렵습니다. 다시 상처받고 실망할 일이 두려워 사람들에 대한 기대를 거둡니다. 공정한 세상, 잘못한 사람이 처벌받는 세상이란 동화 속 이야기에서나 가능할 거라 믿고 자신을 구하려는 노력을 포기하고 맙니다. ‘내가 대체 뭘 더 어떻게 해야 하지, 그동안 그렇게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소리쳐도 소용이 없었는데.’ 폭력의 역사에 지쳐 혼란스럽고 무력해집니다.

이때 필요한 것은 ‘이야기’입니다. 당신의 이야기. 뜬 구름 잡는 말이 아닙니다. 실제로 복합 외상에 효과적인 치료들은 트라우마 상황을 구체적으로 떠올리고 이야기하도록 합니다. 당시 상황과 감정, 생각을 논리적으로 정리하도록 하고, 트라우마 기억의 일부가 휘발되도록 이야기를 청하는 것입니다.

먼저, 트라우마 기억들은 대개 조각나 있거나 가려져 있거나 과장되거나 혼란스러운 상태입니다. 이런 기억의 파편들을 시간 순서에 따라 하나의 이야기로 꿰어가도록 합니다. 당시 정말 어떤 일이 일어났고 일어나지 않았는지 명확하게 바라봅니다. 나는 어떤 생각을 했고 어떤 행동을 했고 어떤 심정이었는지. 전쟁통과 같은 이 시간들을 대체 내가 어떻게 버티고 있는 것인지 스스로가 안쓰럽고 측은하여 감정이 올라오거든 또 그 감정과 같이 가만히 머무릅니다. 내가 그때를 더욱 촘촘히 알아야 촘촘히 위로할 수 있습니다.

또한 긴 재난의 시간을 보내며 나는 형편없이 망가졌고 사람들과 세상은 내게 너무 가혹하고 불공정하며 위험하다는 생각에 마음이 묶여 있다면, 그래서 이런 생각들이 자신을 낙담하게 하고 모든 희망을 가져가 버릴 참이라면, 나의 이야기를 더욱 정확히 바라보아야 합니다. 내 안에서 바꿀 수 있는 지점을 찾아내야 합니다. 잠시 망가진 것은 나 자신이 아니라 나를 보호하기 위해 잠시 느리게 흐르는 내 뇌의 회로이며, 내가 요청을 하기만 한다면 분명 어떤 사람들은 당장 나를 도우려는 태세를 취할 것이라는 것을 알아차리세요. 당신이 다른 이에게 그래왔듯, 다른 이들도 당신을 구하러 옵니다. 시간을 들여 당신의 이야기를 더욱 정확하게 만들어주세요. 틀린 생각을 잡아내세요.

우리가 트라우마 기억을 굳이 끄집어내 말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뇌과학에 기반한 것입니다. 학생 시절, 기말고사가 끝나자마자 며칠을 밤새워 외운 내용이 머릿속에서 모두 감쪽같이 사라지는 경험을 떠올려보세요. 우리 뇌의 해마라는 영역에 저장하는 장기기억들은 사실 적잖이 불안정합니다. 특히, 과거의 일을 회상하느라 입 밖으로 그 이야기를 꺼냄과 동시에 그 장기기억은 더 불안정해지고 휘발됩니다. 그러므로 불편한 이야기를 더욱 요란하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잊고 싶은 기억이라면 말하고 적고 그림을 그리고, 그리고 떠나 보내세요. 더 큰 소리로 이야기를 나눌수록, 나의 해마는 점점 그 기억들을 떠나보냅니다. 이만 하면 되었지, 하고. 다만 그 이야기의 끝은 이렇게 끝내도록 합시다. ‘그래도, 나는 살아남았지’. 당신은 이 이야기의 목격자, 그리고 생존자. 그것이 사실이고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치이니까요.

조금 전까지도 당신의 노력들은 그 어떤 소용도 없어 보였을지도 모릅니다. 지금 홀로 낙담하고 슬퍼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사실 그 노력들은 계속해서 당신을 살게 했습니다. 당신만의 이야기는 당신더러 살라고 했고, 그렇게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살려왔고, 매일, 매 순간, 소용이 있었습니다. 어젯밤에도, 오늘 아침에도, 당신의 노력이 당신을 구원했습니다. 오늘의 이 글도 기억하세요.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 지치고 고단한 마음에도 끝까지 읽어 내려간 이 글을 기억하세요. 당신의 이야기들은, 조금 전과 또 다르게, 방향을 틀기 시작합니다. 당신에게 더욱 대단한 방향으로.

허지원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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