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로 그린 천지, 어느새 내 안에 깃들었다

2024-11-02

장애 이해하려는 사람들 덕에 용기 얻고 ‘한 걸음’

동료들에게 전하리라, 이 멋진 풍광

우리가 백두산 서파에 도착한 시각은 정오를 10분 남겨두었을 때였다. 오전 7시에 숙소를 출발해 백두산 입구까지 한 시간을 달려왔다. 점퍼 안에 옷을 두세 겹 겹쳐 입었어도 한기가 몸을 움츠리게 했다. 구름이 발밑에 있고 태양은 가까워진 만큼 강렬히 망막을 자극했다. 내 발 앞에는 1442개의 계단이 천지를 향해 등을 돌리고 있었다. 연신 승합차들이 내국인, 외국인 상관없이 우르르 관광객을 쏟아놓고 돌아갔다.

어머니의 칠순 기념으로 백두산 탐방여행을 신청했다는 아들은 끝이 보이지 않는 계단 앞에서 도저히 안 될 것 같다며 포기했다. 그는 시각장애만 있는 게 아니라 워킹 보조기구를 사용해야 할 정도로 걷는 것이 불편했다. 애써 웃으며 어머니라도 천지를 보고 오시라, 자신은 밑에서 기다리고 있겠다고 돌아서는 그의 목소리에서 아쉬움과 익숙한 체념이 느껴졌다. 그가 보조기구를 밀며 구석으로 비켜서고는 계단을 올라가는 일행을 배웅했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을 가이드에게 부탁하고 연신 뒤를 돌아보며 무거운 걸음을 뗐다.

나도 지원사와 나무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내 앞에서 중년 여성 둘이 발맞춰 빠르게 계단을 올랐다. 뒤따르던 나는 헉헉 숨을 몰아쉬는데 두 사람은 힘들지도 않은지 속도가 줄지 않았다. 둘은 올케와 시누 관계였다. 눈이 보이는 쪽이 올케였고 시누가 시각장애인이었다. 이를 악물고 두 사람을 쫓아가려 했지만 점점 거리가 벌어졌다. 결혼 30주년을 맞아 함께 여행 왔다는 부부가 나를 추월하며 힘내라고 격려했다. 그 팀은 아저씨가 시각장애인이었고 아주머니는 비장애인이었다. 나는 중간중간 서서 물을 마시고 숨을 돌렸다. 일행들이 계속 나를 스쳐 지나갔다. 시각장애인 이모나 고모를 모시고 온 조카들은 주변 풍광을 설명하며 거친 숨을 씩씩 몰아쉬었다. 그녀들은 안내하랴, 가파른 계단을 오르랴 주변 설명까지 하느라 중턱밖에 오르지 않았건만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지쳐 보였다.

나도 힘내서 다시 계단을 올랐다. 좁은 계단 탓에 내려오는 이들과 어깨를 수십 번 부딪쳤다. 곳곳에 널브러진 사람들을 피해 조심조심 계단을 밟았다. 나무 계단은 원래 그런 것인지 아니면 수많은 이들이 밟은 탓인지 높이가 제각각이라서 잠깐만 정신을 집중하지 않으면 몸이 휘청거리고 엉뚱한 허공에 발을 딛기 십상이었다. 싸늘한 바람에 코끝은 시린데 등에선 땀이 흘렀다. 너나 할 것 없이 외투를 벗어 허리에 묶거나 한쪽 팔에 걸쳤다.

정상까지 300개의 계단을 남겨두고 지원사와 한 번 더 쉬기로 했다. 숨을 고르고 당기는 다리를 스트레칭했다. 지나가던 중국인 남성이 우리에게 조금만 더 힘을 내라 응원했다. 정상 풍광이 끝내준다는 말도 전했다. 나와 지원사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서로를 끌어당겨주며 계단을 올라갔고, 그렇게 우리는 천지 앞에 섰다.

군중들의 탄성과 사진 찍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겨우겨우 사람들의 틈을 파고들었다. 지원사가 천지를 설명했다. 물빛이 하늘과 똑같은 색이라고, 너무도 푸르러서 하늘과 구분할 수 없다 했다. 나는 그녀의 목소리로 풍광을 보았다. 웅장한 산기슭과 깎일 듯한 절벽을. 자연과 세월이 만들어낸 뾰족한 산봉우리들을. 나는 그녀가 이야기해준 광경을 눈앞에 그렸다. 그렇게 천지를 보고 백두산을 느꼈다.

내 옆에서 74세 형이 70세 눈먼 동생에게 서툴고 투박한 언어로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것을 가만가만 일러주었다. 형제는 일행 중 가장 고령이었다. 형은 남은 시간 동생의 눈이 돼주기로 하셨단다. 일흔 노인은 실명한 지 오래되지 않아 불안해했고 행동이 굼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도 정상에 올랐다. 계단 아래에 아들을 두고 온 노모가 천지 구경을 제대로 하지도 못하고 뒤돌아 급하게 계단을 내려갔다. 이 순간을 아들과 함께할 수 없어 아쉽고 애달픈 마음이 발소리에 섞여 있었다.

일행 모두가 가족들과 동행했다. 지원사와 온 것은 나뿐이었다. 좀 서글퍼졌다. 가족들과 함께 오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열두 명 정원의 백두산 탐방에는 서른 명이 넘는 시각장애인이 신청했는데, 선정된 몇 명이 중도에 여행을 포기했단다.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분명 동행자를 구하지 못한 까닭이리라. 나는 누구보다 그 초라한 기분을 이해했다. 여행을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을 이들, 안내자를 구하지 못해 기대로 부풀었던 여행을 포기해야 했던 내 눈먼 동료들의 마음에 서글퍼졌다.

햇빛이 따갑게 피부를 자극했다. 바람이 군중들 사이를 유랑하다 내 손끝 사이로 빠져나갔다. 사람들 틈에서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고 휘청이며 난간까지 몰렸다. 나를 추월해 올라갔던 일행 부부가 자녀들을 위해 기도하는 소리가 도란도란 들렸다. 나는 난간 너머로 손을 내밀었다. 마치 천지를 손으로 만져보기라도 하듯 허공을 더듬었다. 그렇게 내가 본 백두산을 눈먼 동료들에게 전해주어야겠다고 결심했다.

군중 사이를 빠져나와 하산을 시작했다. 그때였다. 불편한 다리 때문에 혼자 남아 있어야 했던 아들이 가마를 타고 올라왔다. 그의 어머니가 명랑하고 밝은 목소리로 가마를 뒤따르며 그에게 주변 풍경을 설명했다. 나는 빛나도록 환히 웃는 두 모자를 보았다. 다시 천지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새카만 내 어둠이 씻겨나가며 상서로운 푸른 기운이 들어찼다. 가슴 가득 천지가 내 안에 깃들었다.

계단을 내려오는 길은 오를 적보다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발을 헛디디는 순간 부상을 입기 십상이었다. 지원사가 계단의 시작과 끝을 알려주었다. 불규칙한 계단은 무척이나 위험했다. 천천히 걸었지만 계단 끝을 아슬아슬하게 뒤꿈치로 짚어 미끄러질 뻔한 상황이 여러 차례 있었다. 중턱쯤 내려왔을 때 지원사가 말했다.

“공공시설을 설계하는 사람들은 필수로 눈을 감고 계단 오르내리기를 해봐야 해요. 이 작은 턱이 누군가에게 얼마나 큰 위험이 될 수 있는지를 겪어보게 해야 해요.”

나는 웃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쏟아지는 햇살이 선글라스를 뚫고 눈으로 파고들어 왔다. 빛은 내 안으로 깊이 투과해 들어 왔다. 가슴이 후끈 달아올랐다. 장애를 이해하려는 사람들 덕분에 나는 용기를 얻고 세상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간다. 백두산 여행도 그 한 걸음이었다. 나는 마지막 계단을 밟고 내려왔다. 먼저 하산한 일행들이 수고했다며 우리를 맞이했다. 내가 올랐던 1442개의 계단을 다시 돌아봤다. 계단 하나하나 수많은 이들이 각자의 사연을 갖고 천지로 향했을 터였다.

모든 일행이 무사히 하산했다. 마지막으로 행사 주최 측인 곰두리체육관의 직원들이 내려왔다. 이 여행에서 가장 감동적이고 고마웠던 점은 체육관 직원들의 태도였다. 그들은 일행들의 앞과 뒤를 말없이 지켰다. 적당히 거리를 두고 여행자들이 충분히 자유로울 수 있게 시간을 주며 기다렸다. 한번은 나와 지원사가 일행을 놓친 적이 있었는데 우리가 불안한 기색으로 두리번거리자 어디서 나타났는지 직원분이 자기가 뒤에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안심시켰다. 현지 중국인 직원들의 배려도 감동적이었다. 하산하는 길에 버스가 갑자기 정차했는데, 운전기사가 안전벨트를 제대로 착용하지 못해 더듬대던 일행의 벨트 끈을 직접 조절해 착용을 돕기 위해서였다. 버스가 다시 출발하면서 나는 이 여행에 잘 왔다고 생각했다.

여행의 마지막 날 공항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한 명씩 소감을 이야기했다. 일행들의 목멘 목소리가 차례차례 공간을 채웠다. 뜨거운 숨이 서로의 마음을 연결시켰다. 곰두리체육관 관장님이 마지막으로 마이크를 잡고 수고했다는 격려를 하다 울컥 감정이 복받치는지 말을 멈추었다. 그 역시 눈먼 동료들의 감정에 동화된 까닭이었다. 그가 말을 잇지 못하자 아들과 동행한 70세 노모가 마이크를 다시 받아들고 크고 명랑하게 노래를 시작했다.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그것은 우리의 바람이었어.”

노래가 끝나자 모두가 힘차게 박수를 쳤다. 서로가 서로에게 보내는 격려와 응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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