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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이 유럽연합(European Union, EU)과 협상 중이다. 다시 EU에 가입하려는 것이 아니냐는 추측이 난무하는 상황이다. 하지만 이것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실제로 영국 총리 키어 스타머가 EU 관계자들을 만나 협상을 진행 중인 것은 맞다. 하지만, EU 재가입을 위한 협상은 아니다. 브렉시트 이후, 영국이 손실을 겪은 부분이 있다. 사회적 혼란과 함께 맞닥뜨린 경제위기는 분명 존재했다.
하지만, 이는 EU도 마찬가지다. 그동안 영국이 유럽 이민자들을 대거 수용해 왔던 것도 사실이고, 174억 유로, 우리 돈 3조 원에 달하는 EU 분담금을 지불하면서 운영에 큰 영역을 차지했기에 영국이 빠져나간 뒤로 EU 역시 어려움을 겪었다(참고로 브렉시트 이전, EU에 분담금을 가장 많이 냈던 나라는 약 250억 유로의 독일이었고 두 번째가 영국이었다).
그래서 영국은 상호 협상이 가능하다고 판단했고, 스타머 정부는 EU와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리셋(reset)" 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재가입이 아닌 실용적인 협력 강화를 목표로 한다. 영국이 추진 중인 협상의 디테일을 알아보자.
무역 장벽 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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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로 협의가 시작된 시점은 2024년 10월이다. 당시 영국 스타머 총리와 우르줄라 폰 데어 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의 회담에서 협력 강화를 위한 논의가 시작되었다(지금은 마로시 셰프초비치(Maroš Šefčovič) EU 집행위원회 부위원장이 영국과의 협상을 주도하고 있다). 최종 협상은 지난 5월 19일, 런던에서 첫 번째 EU-영국 정상회담에서 주요 합의가 이루어졌고, 향후 정기적인 정상회담이 예정되어 있다.
다양한 분야에 대한 논의가 오고 갔다. 무엇보다 중점 사안은 무역 및 규제 협력. 그중에서도 식품 및 음료 무역에 대한 분야가 중점적으로 논의됐다. 브렉시트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영국은 EU의 단일시장과 관세동맹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식품 및 농산물의 무역에 있어 별도의 국경 검사나 인증 절차가 필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2021년 1월, 영국이 EU를 공식 탈퇴하면서 양측 간의 무역 관계는 크게 달라졌다. 특히 식품 및 농산물 무역에 있어 여러 장벽이 생겨났다.

수출품 건강 증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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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령, 동물성 제품과 일부 식물성 제품에 대해 건강 증명서 제출이 의무화되고, 식품 안전 및 식물 검역을 위한 국경 검사가 도입되어, 통관 지연과 비용 증가가 불가피했다. 특히, 신선도 유지가 우선인 농산물의 경우, 배송 시간이 지연되면 부패할 우려가 있어 EU로의 수출이 제한되었다.
가장 큰 문제는 영국령이었던 북아일랜드 국경이 맞닿아 있는 EU의 아일랜드였다. 브렉시트 당시 이 문제가 주요 사안이었다. 도로를 사이에 두고 국경을 넘나들던 지역에 통관을 거치도록 해야 하니 이처럼 난관이 없었다. 결국, 북아일랜드는 EU 단일시장 규정을 일부 유지하면서, 영국 본토와의 무역에 있어 추가적인 검역 절차가 필요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번 협상으로 영국과 EU는 위생과 관련된 새로운 협약, SPS(Sanitary and Phytosanitary)를 발표하면서 무역 장벽 철거의 첫발을 내디뎠다. 먼저 동물성/식물성 제품에 대한 수출입 건강 증명서 요구가 제거되었고, 일상적인 국경 검사가 제거되어 통관 절차가 간소화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브렉시트 이후 제한되었던 신선한 소시지, 햄버거, 일부 어패류 등의 EU 수출이 재개되고, 영국 본토와 북아일랜드 간의 식품 무역에 있어 검역 절차가 간소화되어, 무역 흐름이 원활해졌다.
브렉시트 이후, 물가는 치솟았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는 영국과 EU 간의 무역 관계를 개선하고, 식품 가격 안정화 및 공급망 강화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번 SPS 합의가 연간 약 90억 파운드(약 15조 원)의 경제적 이익을 가져올 것으로 전망하고 있는데, 실제로 식품 가격 하락, 무역 비용 절감, 공급망 안정화 등이 실현될 것인지는 두고 봐야 할 대목이다.
탄소시장 통합 추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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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로 에너지 협력 부문. 우리나라의 대선 토론에서도 주목받았던 에너지 등에 대한 부분도 이번 협상에 주요 안건이었다. 브렉시트 이전, 영국은 EU 배출권 거래제도(ETS: Emissions Trading System)의 정회원국으로서, 영국 내 기업들은 EU 전역의 탄소시장에서 배출권을 사고팔 수 있었고, 탄소 가격 또한 EU 전체의 통합된 규제하에 움직였다(참고로 ETS는 일정량 이상의 온실가스를 배출하는 기업은 배출권을 구매해야 하며, 초과 배출 시 페널티 부과하는 기능을 갖는다).
당시만 하더라도 EU의 ETS는 세계 최대 탄소시장 중 하나였고, 영국도 그 중심에 있었는데, 브렉시트 이후 영국은 자체적으로 UK ETS를 출범시켜 EU ETS에서 분리했다. 영국과 EU 양측의 시장이 분리되면서 탄소 가격 차이가 발생했고, 중복 규제, 행정 부담, CBAM(탄소국경조정제도) 관련 비용도 함께 증가하면서 경제적으로 큰 손실을 보게 되었다. 실제로, 2026년부터 시행되는 EU의 CBAM(탄소국경조정제도)으로 인해, EU와 협상하지 않으면 영국 기업은 연간 약 8억 파운드(우리 돈 1조 3천억)의 비용을 부담해야 한다.
이번 협상에서 무역규제 완화와 더불어 에너지 부분도 논의가 되었는데, 영국과 EU는 양측의 ETS를 연계하기로 합의했다. 이는 탄소 가격이 조화를 이루어 기업들의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돕고, 탄소 시장의 규모가 확대되어 유동성과 안정성 증가에 이익을 가져다줄 것으로 내다봤다. 무엇보다 영국 기업들이 연간 약 8억 파운드에 해당하는 추가 비용을 피할 수 있게 됐다.
이 외에도 전력 시장을 재통합하여 양측의 전력 비용을 절감하고, 북해의 재생에너지 개발 협력을 통해 해상 풍력 발전을 확대하기로 합의했다. 이는 단순히 에너지 비용 절감뿐만 아니라, 전력망을 통합하여 에너지 안보를 강화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안보 파트너십 구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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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는 안보 협상이다. 브렉시트 이전, 영국은 EU의 공동 안보 및 방위 정책(CSDP, Common Security and Defence Policy)과 유럽방위기구(EDA, European Defence Agency)의 핵심 참여국이었다. 당시 영국은 공동 무기 조달, 군사 연구 개발, 위기 대응 작전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었는데, 브렉시트 이후, EU에서 행해지는 모든 방위 연구 프로젝트에서 제외되었다. 이로 인해 영국 방위 산업은 EU 시장 접근성 감소와 협력 기회 축소라는 도전에 직면했는데, 이는 단순히 국방력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 큰 손실을 겪었다. 미국의 록히드 마틴과 함께 무기 시장의 양대 산맥으로 불리던 BAE Systems와 같은 방산업체의 개발 제한은 향후 국방산업에도 위기를 초래할 수 있는 사안이다.
하지만, 이번 협상으로 새로운 안보 및 국방 파트너십(SDP, Security and Defence Partnership)을 구축했다. 이는 영국이 EU의 1,500억 유로 규모의 방위 기금인 SAFE(Security Action for Europe)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계기를 마련했고, 방위 산업의 경쟁력을 다시 강화할 기회가 될 전망이다.
범죄 단속 강화와 공동 대응
마지막으로 범죄 및 이민 협력이다. 브렉시트 이전 영국은 EU의 법 집행 및 사법 협력 체계에 적극적 참여해 왔다. 범죄 정보 공유 및 공동 수사가 가능한 유로폴(Europol), 사법 협력할 수 있었던 유로저스트(Eurojust), 지문, DNA, 차량 등록 정보 등을 공유할 수 있었던 프륌 협정(Prüm Convention)과 특별한 조치 없이 가능했던 범죄인 인도 절차가 가능했던 유럽 체포 영장(EAW) 등이 있다.
하지만 브렉시트 이후, 이 모든 제도에서 탈퇴한 영국은 제3국과 같은 지위를 갖게 되었다. 이는 범죄 대응 능력의 저하로 직결되는 문제이기도 했고, 이에 따라 범죄율이 동반 상승하게 되는 역효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실제로 범죄인 추적에 대한 한계를 이용하여 영국 내 마약 범죄가 늘고 있는 것도 이러한 틈새 때문이다.

2024년 8월4일, 영국 미들즈버러에서 반이민 시위가 열려 자동차 한 대가 불에 타고 있다
사실, Reform UK를 비롯하여 영국의 보수당과 이를 지지하는 지지층은 이민자들을 막기 위해 영국이 EU로부터 독립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세밀한 부분을 살펴보면 국가이익 증대 차원에서 영국이 그간 EU와 함께 협력하여 이룬 이득이 더 크다. 브렉시트 투표를 할 당시만 하더라도 이러한 사항을 자세히 알지 못했던 영국의 시민들은, 3조 원에 육박하는 분담금을 왜 지불해야 하는지, 왜 우리 세금으로 EU에 가입된 개발도상국들에 재정지원을 해야 하느냐 등의 의문을 품고 있었지만, 실질적으로 영국이 누리는 혜택은 분담금 이상의 값어치가 있었다는 것이 시간이 지나면서 나타나고 있었다.
어쩌면, 이러한 현실성이 바탕이 되어 지난 총선 때 노동당이 큰 승리를 한 것이 아니었을까 추측한다. 아무튼! 영국과 EU는 범죄/이민 협상을 통해 범죄 대응 능력을 강화하고 불법 이민에 대한 공동 대응을 높여 마약이나 기타 범죄(인신매매 및 밀입국 조직)에 대한 단속을 강화하기로 합의했다. 향후 협상의 진행 상황에 따라, 이러한 협력은 더욱 확대될 것으로 예상된다.
당분간은 재가입 아닌 RESET!
재가입은 아니다. 적어도 당분간 그럴 일은 없으리라 예상된다. 하지만, 브렉시트 이전과 같은 긴밀한 협력 관계가 불가피한 상황이다. 처음에는 양측 모두 자존심 세우기에 몰두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회 곳곳에 숨겨져 있던 구멍들이 점차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는 경제와 외교, 안보 등 다양한 부분에서 나타나고 있었다.
키어 스타머 총리는 영국의 EU 재가입을 고려하지 않고 있다. 다만, 실용적인 협력을 통해 양측의 이익을 추구하고 있다. 영국의 언론들은 Reset이라는 표현을 쓴다. 정치적 민감성을 고려한 전략으로, 경제 성장과 안보 강화를 목표로 명명한 단어다. 과연 노동당 정부의 Reset 정책이 어떤 효과를 가져오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