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리천에 묻어다오”
선덕여왕의 유언은 “도리천에 묻어다오”였다. 하지만 이 말은 아버지 진평왕의 유지(遺志)였을 가능성이 높다. 선덕여왕(632~647)은 도리천(불교의 우주관에서 세계의 중심)이 있는 수미산 꼭대기에 장사 지내달라고 유언했다. 이에 신하들은 그곳이 어딘지 몰라 당황했고, 왕은 낭산의 남쪽이라고 알려 주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그럼 선덕여왕릉을 낭산에 조성한 것은 그녀의 유언 때문일까? 아니다. 아버지의 아이디어였다. 선덕여왕의 아버지 진평왕(579~632)은 왕실을 석가족에 빗대어 신성화했는데, 그 맨 꼭대기에 선덕여왕이 있다. ‘선덕’이란 이름은 <대방등무상경>(大方等無想經)의 ‘선덕바라문’(善德婆羅門)에서 유래한다. 선덕바라문은 경전에 이렇게 나온다. 석가모니 부처님으로부터 장차 전륜성왕(轉輪聖王)이 되어 불법(佛法)으로 세상을 다스리고 교화할 것이라는 예언을 받은 인물이다. 또 도리천(忉利天)의 왕이 되기를 바랐던 인물로 묘사된다.
그러니까 아버지 진평왕은 자기 가족의 이름에 불교적 색채가 강한 명칭을 사용한 것이다. 특히 여성인 선덕여왕이 왕위에 오르는 것에 대해 불교적 정당성을 강하게 부여했다. 비록 여자지만 전륜성왕의 운명을 타고난 선덕바라문과 같은 이름을 사용해 그녀의 즉위를 합리화하고 왕권을 강화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
그런데 ‘선덕여왕’은 죽어서 받은 시호가 아니라 살아 있을 때부터 이미 ‘선덕’이란 이름을 사용하고 있었다. 이로 볼 때 모든 시나리오는 아버지 진평왕의 연출임을 짐작할 수 있다. 말하자면 선덕여왕을 낭산 정상에 장사 지내고 그곳을 도리천으로 인식되도록 기획한 인물이 진평왕이라는 말이다.
참고로, 낭산(狼山)에 대해 알아보자. 낭산은 신라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지만 산 이름의 유래조차 명확하지 않을 만큼 주목을 받지 못해 왔다. 흔히 낭산을 狼山이라 쓰고 ‘늑대 산’으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다. 늑대(이리)가 엎드린 형상이란다. 그럴 수도 있지만 학계의 의견은 다르다. 사마천의 <사기>에 보면 동쪽의 큰 별을 ‘낭狼’으로 부른다고 했다. 그러니까 신라 왕궁의 동쪽 또는 동남쪽에 자리한 까닭에 낭산으로 불렸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분황사 ‘화쟁국사지비부’
화쟁국사지비부는 원효대사를 추모하기 위해 세운 비석의 받침돌이다. ‘차화쟁국사지비부(此和諍國師之碑趺)’를 보자. 직역하면 ‘차(이것은)+화쟁국사(원효대사)+지비부(~의 비석받침)’이다. 정리하면 분황사에 있는 화쟁국사(원효대사)의 비석 받침돌이란 소리다. 고려 숙종이 원효에게 내린 시호는 분명히 화쟁국사(和諍國師)다. 하지만 고려사 등 일부 문헌과 현지 안내판, 지역의 카탈로그 등에 보면 화정국사(和靜國師)라고 잘못 쓰인 경우가 더러 있다. 화쟁국사는 원효의 불교 사상의 핵심인 화쟁사상에서 따온 이름이다. 분황사의 비석 받침돌에도 화정국사(和靜國師)라고 새겨져 있는데 이것은 당시 사람의 큰 실수다.
비부를 보자. 비석 받침의 윗면에는 비신을 꽂았던 직사각형 홈이 파여 있다. 윗면의 사각 모서리 일부는 떨어져 나갔다. 옆면에는 옅은 안상(眼象)을 새겼다. <동국여지승람>에는 고려 평장사 ‘한문준’이 비문을 지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고려 숙종은 1101년에 원효대사에게 ‘대성화쟁국사(大聖和諍国師)’라는 시호(諡號)를 내리고 이곳 분황사에 비석을 세웠다.
원효 스님은 분황사에 오래 머물렀다. 국내 스님 중 원효만큼 저서를 많이 남긴 이도 없다. <대승기신론>이 대표적인데 불교 경전에 대해서 주석을 단 책이다. 너무 유명해 중국과 일본의 승려들이 교과서로 채택할 정도였다. 이처럼 동방의 성인임에도 그 덕이 크게 드러나지 않고, 훌륭한 저서를 남겼으나 마땅한 대접도 못 받고, 남아 있는 서적도 별로 없음을 안타깝게 여긴 고려 숙종이 “대성화쟁국사”라는 시호를 내리고 원효대사가 가장 오래 주석한 분황사에 그 비석을 세운 것이다.
분황사 ‘화쟁국사지비부’에 흠집 낸 추사 김정희
김정희는 비석만 보면 사족을 못 쓸 정도로 좋아한 사람이다. 그는 24세 때 동지부사로 임명된 생부 김노경을 따라 청나라에 갔다. 이 기행에서 당대 최고의 고증학자이자 금석학자인 옹방강과 완원을 만나 깊은 학문적 교류를 나누었다. 또 청나라에 가기 전 이미 북학파 실학자인 박제가의 제자가 되어 고증학에 대한 지식을 접했다.
금석(金石)은 철판이나 돌판에 새긴 글을 연구함으로써 과거사를 알아내는 학문이다. 말하자면 비석의 글을 여러 기록과 비교해 사실인지 여부를 고증하는 것이다.
조선시대 금석학의 대가 추사 김정희가 이곳 분황사에 답사와서 비석은 못 찾고 비석 받침만 남아 있어 매우 실망하면서 비석 받침 표면에 자신이 왔다 갔다는 흔적(싸인)을 남겼다(잘 보면 쇠 金자와 바를 正자가 보인다). 더군다나 친구와 함께 와서 친구 이름까지 새겼다. 고약한 한국병이다.
‘화쟁국사지비부’의 비신은 왜 사라지고 없을까?
분황사 석정 앞에 있는 화쟁국사비는 몸돌(비신)은 깨져 없어지고 비부(받침돌)만 남아 있다. 임진왜란 때 사찰이 파괴되면서 함께 소실됐기 때문으로 추정하지만 또 다른 이야기가 있어 소개한다.
탁본이 그 원인이라고 한다. 조선시대 이 비석의 탁본을 부탁하는 중앙 관리들의 요청이 귀찮아진 지방관리들이 궁여지책으로 부수어버렸다는 것이다. 전하는 말로는 업무를 못 볼 정도로 상부의 요청이 쇄도했다고 한다. 그 결과 비신을 일부러 깨버렸고 현재 비부만 남아 있다.
그 이후의 이야기가 이 가설의 신빙성을 더한다. 깨진 비석은 지금 한 조각도 못 찾았다. 신라 시대의 비석 중 하나라도 온전한 게 없다. 있다면 깨진 조각 몇 개다. 만약 우리 중에 비신을 본 것이 있다면 그것은 복원한 것이다. 신라 시대의 수많은 비석 몸돌은 이처럼 깨져서 누군가 주워갔다. 주워가서 빨래판으로, 돌담으로, 구들장으로, 장독대로, 논둑으로 사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지금 보문들에 가보면 옛날 사찰의 돌이 굉장히 많다고 한다.
원효대사의 장례는 풍장(風葬)이었다. 시신을 노천에 두어 새와 짐승이 먹고 뼈만 남는 식이다. 아들 설총은 아버지의 남은 뼈를 가져와 빻아서 진흙을 섞어 생전 아버지의 모습으로 빚어 분황사에 모셔두고 조석으로 문안을 드렸다고 한다(삼국유사). 설총은 아버지의 진흙상을 정면으로 보기가 멋쩍었다. 아버지가 너무 위대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마치 신하들이 임금을 바로 정면으로 보지 않고 비껴보는 이치와 같다.
그러던 어느 날 설총이 문안 인사 갔더니 원효의 소조상이 아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듣고 일연스님이 직접 분황사에 왔다. 그리고는 삼국유사에 “아직도 소조상이 고개를 돌리고 있다”라고 기록했다. 이때가 원 간섭기(충렬왕~충선왕)였고 삼국유사의 기록으로 비추어 1200년대 말까지만 해도 원효의 소조상이 분황사에 있었다는 뜻이다. 소조상이 그 이후 어디로 갔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분황사 보광전 동안(童顏)의 약사불
모전석탑과 마주하고 있는 전각은 분황사의 대웅보전인 보광전이다. 보광전 안에는 천장에 닿을 듯 거대한 3.45m의 금동약사여래가 서 있다. 신라 경덕왕 때 30만 근이 넘는 금동약사여래입상을 봉안했는데 임진왜란 때 화재로 소실됐다.
1998년 분황사 보광전을 해체 보수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상량문(上樑文)과 관련 기록(묵서)에 따르면 1609년에 경주의 불자들이 시주하고 다시 힘을 모아서 동 5360근으로 금동불상을 만든 것이 지금에 이른다고 한다.
약사불은 거대한 크기와 달리 둥글고 통통한 얼굴에 상대적으로 어깨는 왜소하며 동안(童顏)을 띠고 있다. 몸은 3등신에 가깝고 마치 애기 몸과 같고 표정도 천진난만하다. 불상의 왼손에 들린 약합 뚜껑의 기록을 통해 1774년(영조 50년)에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2017년에 엑스선 형광 분석으로 이 불상이 구리와 주석의 합금인 청동으로 주조됐음이 밝혀졌다(그 이전엔 소조상이라 했다). 동으로 만든 불상의 겉면에 흙을 발라 조각하고 금을 입혔다. 이때가 1774년이다.
이 불상은 2022년 2월 22일에 보물로 승격되었는데 이유가 있다. 임진왜란 이후에 조성된 불상 중에서 동으로 만들어진 것은 극히 드물고, 또 크기가 3.5m에 달하는 것은 이 불상밖에 없다는 등의 희귀성으로 학계에 가치를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참고로, 과거 보광전에서는 ‘원효선사대제’를 지냈다. 지금 보광전 안에 들어가 오른쪽에 보면 스님이 한 분 그려져 있는데 원효다.
분황사 마당에 있는 석정(芬皇寺石井)
이 우물은 일명 ‘호국용변어정’(護国竜变魚井)으로도 불리는데 ‘나라를 지키는 용이 물고기로 변한 우물’이라는 뜻이다. 틀의 높이가 약 70cm이고, 겉은 팔각인데 내부는 원형이다(팔각은 불교의 팔정도를 뜻하고 원형은 불교의 진리를 상징한다).
국내에 남아 있는 통일 신라 시대의 돌우물 가운데 가장 크고 우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보존 상태가 매우 양호하며, 신기하게도 지금까지 마르지 않고 있다. 1965년에는 이 우물에서 머리 없는 14구의 불상이 발견됐다. 조선시대에 분황사에 있던 모든 돌부처의 목을 잘라 이곳에 넣었다는 아픈 이야기가 전한다.
여기서 잠시 비슷한 말인 ‘삼룡변어정’에 대해 알아보자. 이 말은 20년 전쯤 부르던 말인데 약간은 오류가 있는 말이므로 호국용변어정이라 하는 게 좋다. 삼룡변어정이란 말은 어째서 나온 말일까? 이 말은 이곳 분황사의 우물에 살던 세 마리의 용이 물고기로 변했다는 데서 비롯됐다. 호국용변어정은 삼국유사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이곳 우물과 청지와 동지 세 연못에 살던 용이 나라를 지킨 용이라는 점에 방점을 두었다. 즉 세 마리의 호국용이 이곳 우물에서 물고기로 변했다는 것에 주안점을 둔 말이다.

천수관음도와 호국룡변어정
보광전 금동여래입상 좌벽에는 원래 신라 시대 신의 화가라고 불리던 솔거의 천수관음도가 있었다고 한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그 탱화의 천수관음보살은 27개의 얼굴, 40개의 손, 1000개의 눈을 갖고 있었다.
신라 경덕왕 때 한기리에 사는 ‘희명’이라는 여인의 다섯 살 된 딸이 갑자기 눈이 멀었다. 어머니 희명은 아이를 안고 분황사로 가서 솔거가 그린 천수관음보살상 앞에서 매일 간절하게 기도를 올렸다.
“천수관음은 천 개의 눈을 가졌으니 바라옵건데 제 딸에게 하나만 나눠주세요.” 여인의 지극한 정성에 감응해 천수관음보살이 손 하나를 내밀어 아이의 눈을 어루만져 주었고 아이는 시력을 되찾았다(또는 천수관음이 희명의 딸에게 눈 하나를 내어주었다는 버전도 있다).
우리는 흔히 오합지졸을 ‘당나라 군사’라 말한다. 대단한 당나라 군대가 신라에 졌기 때문에 생긴 오명이다. 화가 난 당나라 황제가 대체 신라가 뭣 때문에 강한지 알아보라는 명을 내린다. 삼국유사에 이 우물에 관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때는 원성왕 11년(795년), 분황사 우물과 금학산 동천사(東泉寺)의 동지(東池)와 청지(靑池)라는 우물에 신라를 지키는 세 마리의 용이 살았다. 황제의 명을 받은 당나라 사신이 이 우물에 찾아와 주술을 써서 세 마리의 용을 물고기로 만들어 대나무 통에 담고 뚜껑을 닫아 당으로 돌아갔다.
이에 세 명의 여인이 제38대 원성왕을 찾아와 울부짖었다. 왕이 물었다. “뉘시오?” “우리는 호국용의 부인들인데 당나라 사신이 용을 물고기로 변신시켜 남편을 당나라로 잡아가고 있으니 왕께서 저의 남편을 구해주십시오.” “지금 어디쯤 가고 있습니까?” “아마 하양쯤일 겁니다.” 이 요청에 왕은 직접 말을 타고 사신을 찾아갔다. 지금의 경산 하양 지방(굉장히 오래된 지명임을 알 수 있다)에서 당나라 사신을 따라잡았다.
임금이 사신을 호통치고는 대나무 호롱에 잡아간 물고기 세 마리를 찾아서 각 우물에 넣으니 물이 한 길이나 솟아오르고 기뻐하며 날뛰었다. 그리고는 바로 용으로 변해 사라졌다.
이 두 이야기는 여왕의 지혜로 세워진 모전석탑과 백성들의 이야기가 덧대어지며 1000년 넘게 이어져 온 것이다. 천수관음 전설은 마치 어두운 밤에 반딧불이를 만난 것처럼 듣는 이의 마음이 훈훈해지고 희망이 싹트게 한다.
어쨌든 이 이야기 덕분인지 분황사는 ‘기도빨’이 좋다고 한다. 특히 분황사 우물 이야기는 이곳이 단순한 우물이 아니라 신라를 수호하는 신성한 힘을 지닌 곳임을 보여준다.
글 김상범 울산지역사답사회 부회장
사진 변상복 울산지역사답사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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