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1년 3월 14일. 청와대 영빈관 앞으로 이날 오전 9시부터 검은 승용차들이 줄지어 들어왔다. 노재봉 국무총리를 비롯해 각계 인사들이 차에서 내렸다. 이들은 곧장 영빈관 회의장으로 입장했다.
오전 9시 30분. 노태우 대통령이 회의장에 입장해서 참석자들과 악수를 나누고 곧바로 '제조업 경쟁력 강화 대책회의'를 주재했다.
회의에는 국회, 정당, 경제계, 학계, 언론계, 근로자 대표 등 250여명이 참석했다. 특히 근로자 대표가 청와대 회의에 참석한 것은 이례적이었다.
이날 회의는 정부가 우리 경제의 뿌리인 제조업의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 마련한 야심작이었다.
정해창 전 대통령 비서실장의 회고. “정부는 대책 마련에 앞서 1990년 5월부터 24개 업종의 경쟁력 실태를 조사했다. 그 결과를 토대로 9월부터 12월까지 업종별 산업발전민간협의회를 개최했고 1991년 1월부터 관계부처 협의를 거쳐 강화 대책을 마련했다.”(대통령 비서실장 791일)
대책회의는 노 대통령이 주재한 가운데 TV와 라디오로 전국에 생중계했다.
“오늘 기업인과 근로자 그리고 각계 대표들과 함께 '제조업 경쟁력을 어떻게 하면 강화시킬 수 있을까' 하는 방안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토의하기 위해 회의를 연 것을 매우 뜻깊게 생각합니다. 제조업 경쟁력 강화와 관련해 문제와 해결책이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토의하고, 폭넓은 정책 건의를 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럼 부총리부터 보고를 시작하시죠.”
노 대통령 말에 따라 최각규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을 시작으로 재무부, 교육부, 상공부, 건설부, 노동부, 과학기술처 등 7개 부처 장관들이 차례로 부처별 제조업 경쟁력 강화 대책을 1시간 15분여에 걸쳐 보고했다.
최각규 부총리는 “우리 경제의 성장 기반인 제조업 경쟁력이 한계에 직면하고 있다”면서 “정부는 △산업기술 개발 촉진 △금융과 세제 지원 △산업인력 공급 확대 △공장용지와 기반시설 확충 등 경쟁력 애로사항 해소에 적극 나서겠다”고 보고했다.
김진현 과학기술처 장관은 “정부출연연구기관이 보유한 기술의 기업화를 추진하고 총 138개 과제를 1~2년 내 민·관이 공동 개발해서 실용화할 계획”이라면서 “△한국과 소련 간 기술협력을 통해 천연가스 겸용 엔진연료 장치 등 38개 기술을 개발하고 △한국과학기술원(KAIST) 석·박사 정원을 올해 910명에서 내년 1200명으로 확대하겠다”고 밝혔다.
이봉서 상공부 장관은 “중소기업들이 공통 애로를 느끼고 있는 전자부품과 반도체 등 902개 기술을 포함한 총 919개 생산기술을 정부와 민간이 50%씩 부담, 모두 1조5000억원을 투자해서 1995년까지 국산화할 계획”이라면서 “올해 공공부문의 소요 재원 1550억원 가운데 930억원은 보조금, 620억원은 융자로 각각 지원하겠다”면서 “전자정보, 자동차, 기계, 철강, 섬유, 석유화학, 조선, 신발 등 8개 주요 업종별 경쟁력 대책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정영의 재무부 장관은 “주력업체에 대한 여신관리를 완화해 대외경쟁력 강화를 지원하되 비주력기업에 대해서는 일정 시점에서 대출 비율을 동결하는 한편, 비주력 계열사를 처분하는 그룹에 대해서는 여신관리상 별도의 우대방안을 강구, 업종 전문화를 유도해나가겠다”고 보고했다.
정 장관은 “또 제조업 전체에 대한 금융지원 강화 방안으로 △올해 국산기계 수요자 금융을 당초 예정보다 1조1000억원이 늘어난 3조8000억원을 공급하고 △5개 지방리스사 신설을 추진하며 △외화대출 자금으로 대기업이 일본에서 도입할 수 있는 첨단설비 범위를 확대하고 △해외증권발행 가능 업체수를 현재 65개사 내외에서 100개사로 확대하겠다”고 보고했다.
정 장관은 “외국환관리제도를 개선, 기자재와 자금의 송출입 절차를 간소화하고 해외에서의 연구활동 기술용역비에 대한 송금 규제를 완화해 해외 기술개발도 적극 유도하겠다”고 밝혔다.
이진설 건설부 장관은 “공장용지의 원활한 공급을 위해 관련업계가 요청한 925만평의 공단을 조기에 개발하고, 서해안 일대 간척매립지 1070만평을 공장용지로 전환하며, 20개 공단 1900만평을 새로 지정해서 1996년까지 조성을 완료하겠다”고 보고했다.
윤형섭 교육부 장관은 “국립공대 설립을 추진하고, 첨단학과의 전과 범위를 현재 10%에서 20%로 확대하며, 공대를 지망하는 우수고교 졸업생에 대해서는 해외 유학 기회를 확대하겠다”고 보고했다. 윤형섭 장관은 또 “자연계 대학원 정원도 이공계 중심으로 1년에 2500명씩 1995년까지 1만명을 늘리고, 산업체의 전문기술 인력 양성을 위한 특수 목적의 대학 설립도 허용하겠다”고 밝혔다.
최병렬 노동부 장관은 “생산직 인력난 해소를 위해 업종별 전문직업훈련원 10곳을 추가 건립하고, 기업의 사내훈련 의무 비율을 내년까지 0.6% 수준으로 높이겠다”고 보고했다.
각부 장관 보고 후 참석자들의 자유토론이 1시간여 이어졌다. 첫 발언자는 조완규 서울대 총장이었다.
△조완규 총장=우리 산업계가 후퇴하는 것은 신제품 개발을 위한 기술 능력 부족과 연구 투자비 부족, 양질의 기능인력이 모자라기 때문이다. 앞으로 생산성 향상과 기술개발 촉진, 효율성 제고, 양질의 기술인력 양성만이 이를 극복할 수 있다.
△이경훈 한국공작기계협회장(대우중공업 사장)=기업은 자금 조달이 어렵다. 설비투자가 위축될 수 있다. 일본, 대만, 홍콩 등 경쟁국에 비해 이자율도 높다.
△최각규 부총리=최근 우리 연구개발비가 국민총생산(GNP) 대비 2% 높아졌다. 1996년까지 4% 수준으로 올릴 계획이다. 다만 연구개발 투자는 민간도 늘려야 한다.
△최종태 서울대 교수=사람은 많은데 기업에서 쓸 사람이 적다. 현장과 기업이 원하는 인력을 양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현장 중심의 기술교육을 해야 한다.
△구자학 한국전자공업진흥회장=반도체의 경우 미국, 일본, 유럽 등은 기술개발 자금 50%를 정부가 지원한다. 우리는 39.5% 수준이다. 선진국 수준으로 자금을 지원해 주면 2000년 이전에 세계 2위 반도체 수출국으로 발전할 수 있다.
△이상범 현대자동차 노조위원장 =부동산 투기로 벌어들인 불로소득을 뿌리 뽑고, 물가와 땅값을 안정시켜야 한다. 노조도 정부에 적극 협력하겠다.
△최 부총리=전자공업에 대한 정부 지원은 지금 40% 수준이다. 해를 거듭할수록 규모가 늘어날 것이다. 부통산 투기나 불로소득은 정부가 모든 행정력을 동원해 근절하겠다. 근로자들의 의욕 고취에도 최대한 노력하겠다.
노 대통령은 자유토론이 끝나자 마무리 발언을 했다.
노 대통령은 마무리 발언에서 관계부처에 업무 지시를 하고 기업에는 협조를 요청했다.
노 대통령의 마무리 발언은 A4용지로 3쪽반 분량에 달했다. 그런 만큼 업무 지시와 협조 내용은 구체적이었다.
“여러 좋은 의견을 제시해 주셔서 유익한 회의였습니다. 우리는 이제부터라도 기술 자립을 위해 제품 개발, 공정 개선, 품질 고급화 등 기술혁신에 전력해야 합니다. 기술경쟁 시대에 승자가 되도록 민·관이 합심해야 하며, 기술개발이나 생산성 향상의 주체는 바로 기업입니다. 모든 기업들이 1사 세계 일류 1기술을 확보하겠다는 신념으로 노력하고 정부도 획기적인 지원책을 강구하겠습니다.”
노 대통령은 “부총리는 추가경정 예산을 편성할 때 생산기술 개발 자금을 최대한 확보하고, 고급기술 인력난을 해소하기 위해 우수 공대 입학 정원을 2000명 범위 안에서 늘리도록 하라”면서 “국무총리는 과학기술계 출연 연구기관 22개가 연간 2500억원의 예산을 사용하고 있는데 관련부처 합동 평가반을 구성, 정밀 진단해서 그 결과를 보고해 달라”고 지시했다.
노 대통령은 “기업도 문어발식 확장을 지양하고, 주력 업종을 세계 1류 기업으로 키워서 첨단기술에 도전해 달라”면서 “세계 일류 기업이 되려면 근로자의 적극 참여로 생산성을 향상시키고 근로자가 직장을 평생 직장으로 생각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오늘 각 부처가 보고한 내용에 대해 1년 후 이 자리에서 대통령이 점검회의를 주재, 추진 결과를 확인하겠다”면서 “제조업 경쟁력 강화에 범국민 분위기를 조성해서 추진하면 우리도 반드시 선진국에 진입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이후 정부는 1년 후 점검회의 방침을 변경하고 매분기 추진사항을 점검했다)
정부가 이날 발표한 제조업 경쟁력 강화대책은 기업에는 생명수와 같았다. 제조업에 봄이 오고 있었다.
이현덕 대기자 hdlee@etnews.com